▶ LI해양대학서 공매로 내놓은 함정 17,651달러에 낙찰
대한민국 해군 1호 전투함 백두산함
유학생활.잡화 비즈니스. 시 검열국서 일본문서 번역등 15년간 뉴욕생활
대사관 참사관 시절 한국정부서 "18,000달러로 군함 사서 보내라" 특명
지난 9월초 대한민국 해군 1호 전투함 백두산함에 대한 기사가 한국신문들에 일제히 실렸다. PC 701이란 넘버를 단 군함의 사진과 함께 당시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섭 씨의 회고담이 실렸다. 이 군함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출범한 한국 해군에 전투함이 없던 시기 참모총장으로부터 말단 수병에 이르기 까지 전투함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 결과 모아진 1만5,000 달러로 미국에서 구입한 2차대전 당시의 연안 초계정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백두산함은 한국전쟁 발발 당일인 1950년 6월25일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음도 또한 밝혀졌다. 이날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항해하던 1000톤급 북한 수송선을 울산 앞바다에서 교전 끝에 격침시켰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만일 이때 북한 특수부대원 600명이 부산에 상륙했다면 후방기지 교란 등 한국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 기사를 접한 필자의 뇌리에 25년 전쯤 로스앤젤레스에서 인터뷰했던 김세선 전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해방전 뉴욕에서 컬럼비아 대학원을 마치고 뉴욕대에서 박사학위를 하면서 비즈니스의 길로 뛰어들어 돈을 착실하게 모았던 사람이었다. 뉴욕에서 결혼도 하고 종전 무렵엔 미 국무성 검열국에 들어가 일본에 관한 극비문서를 취급하는 공무원 생활도 한동안 했었다. 이승만과 절친했던 관계로 워싱턴 대사관 창설을 주도했고 장면 대사 밑
에서 참사관을 지내던중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해군 함정을 어렵사리 구입해 보낸 스토리를 필자에게 들려준 일이 있었다. 바로 그 스토리가 백두산함에 얽힌 일화였다.
한국정부는 그에게 미화 1만8,000달러를 송금하면서 군함을 한척 사서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그 자금은 우리 군인들이 모금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금액으로는 자동차나 몇 대 산다면 가능한 일이겠으나 배를 한 척, 그것도 군함을 구입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주문이었다고 했다. 상무성을 찾아가 그 뜻을 전했더니 마침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해양대학에서 함정 한척을 공매로 내놓은 매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이 입찰 마감이라는 소식이었다.
책임자를 만나 함정에 대한 재원을 문의한 결과 건조한지 4년이 되었고, 항해는 3회 밖에 하지 않아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으나 건조비용이 약 400 만 달러라는 것이었다. 1만8,000 달러로는 어림없는 가격이었다.
국가차원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므로 기왕 외국 원조를 하는 마당에 그 함정을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낙찰시켜 주도록 김세선은 상무성에 간절히 요구했다. 책임자의 답변은 확실치 않았으나 자신 같으면 입찰 최고가격을 2만달러, 최저가격을 1만5,000달러로 써넣겠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롱아일랜드로 달려가 마감날 입찰가격을 1만7,651달러, 입찰자는 한국정부로 기입해 넣었다. 며칠을 긴장 속에 기다렸는데 결과를 보니 우리쪽에 낙찰이 되었다.
한편 배는 샀으나 태평양을 항해할 면허 소지자가 없어 미 해군서 1명을 차출했고 본국서 18명의 해군 요원들이 도착했다. 이들에게 항해기술을 가르치고 배를 수리하는 동안 숙식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궁한 나머지 해양대학 교장인 매킨택 중장에게 실정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그 해양대 기숙사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었다. 군함이 떠나기 직전 미 해군성에 떼를 써서 작은 포 2문을 얻어 앞뒤에 매달았는데 이 배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 북한 공산함정을 격침시켰다는 놀라운 전승 소식이 뒤이어 전해졌다. 모든 것이 구걸외교로 통하던 시절의 눈물겨운 회고담이었다.
김세선은 해방 전 도미 유학생이었다. 그가 뉴욕에 발을 디딘 것은 1931년이었다. 시카고의 일리노이 공대(ITT)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경제학 공부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원에는 김활란, 이철원, 오천석, 장리욱 한승인 등이 적을 두고 있었다. 석사를 마치고 뉴욕대에서 박사학위를 밟다가 비wm니스 기회가 찾아왔으므로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당시 학생들 중에는 중국제와 일본제 물건을 받아 가가호호 방문하는 고학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물건을 사오는 과정에서 일본계 모기 모모노이라는 회사와 모리무라라는 또다른 수출회사와 연결이 되어 잡화 도매를 하게 되었던 것. 일본 회사 크레딧 매니저가 알고 보니 와세다 대학 동창이었으므로 그에게 독점권을 주어 7~8년간 재미를 보았다. 지방판매망도 생겨 여행할 기회도 더러 있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 유학생 파티에서 만난 세살 아래 마운트 홀리오크 재학 중이던 한인 여학생 앤과 38년에 결혼, 123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잘 나가던 그의 동양 잡화 비즈니스는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침공으로 중단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에 돌입하자 미국정부는 일본 말을 할줄 아는 한인들을 상당수 차출했는데 그때 김세선도 예외일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이어서 우대를 받았다. 미 국무성 산하 검열국에서 일본 문서를 번역하고 분석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해방직전까지 뉴욕시 검열국에서 근무했던 그는 종전 무렵 워싱턴 본부로 스카웃 되어 가면서 15년간 정들었던 뉴욕을 떠나게 되었다.
뉴욕에 살면서 그는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다. 다만 박사학위 공부를 마치고도 비즈니스로 뛰어드는 바람에 학위를 취득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현실과 타협한 셈이 되었다. 그의 워싱턴 생활은 때마침 구미위원부를 기점으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던 이승만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과는 그가 미국 유학 초기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가지고 하와이에서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재회라는 형식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국무성 검열국 요원으로서 김세선은 누구보다도 일본의 패망소식을 먼저 이승만에게 전할 수
있었고 이승만은 얼마 후 미 육군대령 굿펠로의 주선으로 군용기 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김세선에게 워싱턴 대사관 설립 임무를 맡겼다. 초대 장면 대사가 부임하고 김세선이 참사관으로 갖가지 실무를 담당했다. 영문 서기로는 가톨릭 유니버시티 총장 여비서 아그네스 데이비스를 채용했고 한국학생 1명을 채용키로 해서 한표욱을 불렀다. 그렇게 4명으로 출발헸던 주미한국 대사관은 요즘 수백 명이 넘는 대식구로 불어나 있다.
김세선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고 했다. 아들 로널드는 남가주 대학 어바인 켐퍼스의 의대 교수로 있었고 딸 일레인(혜경)은 버클리대 인종학과 교수로 있었는데 몇 년 후 어떤 세미나에서 일레인 교수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의 아버지 이야기로 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사이 김세선은 타계했던 것.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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