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고국 후배들 위해 ‘책 보내기’ 운동 주도
서울의 6.3학회 멤버들이 지난 87년 3월 백선기 부부(가운데 앉은이)에게 ‘한국사회의 제문제’라는 동인지 창간호 헌정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노재봉, 김경원, 유세희, 김신행, 김병국, 김상중, 이형등이 참석했다.
1956년이면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쯤의 일이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총성이 멎은 직후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마땅히 읽을 책이 없었다. 책값이 비싼 것은 둘째 치고 전문서적을 찾아 읽을꺼리가 없었다. 더구나 전문분야에서 한참 앞서가는 외국서적을 구해 읽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이 시절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미국유학의 길에 올랐던 학생들이 똑같은 난관을 겪고 있는 고국의 후배들을 위해 뉴욕에서 도서수집 운동을 벌였던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백선기
뉴욕에서 한인유학생회가 창설된 것이 1956년의 일이었고 그 첫 사업으로 조국에의 선물 캠페인을 벌였던 것. 컬럼비아대와 뉴욕대를 중심으로 각 대학의 유학생들로 부터 호응을 얻은 끝에 연일 각지로 부터 도서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가난에 찌들은 조국을 등뒤로 하고 왔기 때문에 눈물나는 고국의 가난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학생들로 부터 답지한 책들은 거의가 영문 전문 서적들이었다.
이때 주최측이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책은 무료로 기부를 받았으나 운임이 수취인 부담으로 되어 있었던 탓에 그 많은 액수의 운송료를 받는 쪽에서 무는 게 고민꺼리였다. 매일 아파트로 밀려 들어오는 책들을 반송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처럼 호의를 베푼 학생들에게 반송이란 생각만 해도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행동이 아닌가. 고민을 떠맡은 백선기 당시 회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공관,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한미재단 등을 찾아다니며 해결책을 논의해 봤으나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주위의 교포들이 딱한 사정을 듣고 몇십 달러씩 기부했으나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이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곳이 세계대학봉사회. 백선기의 열정에 감동된 세계대학봉사회는 뉴욕에 도착된 이후의 도서 운임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경과를 거쳐 이듬해에 수집된 도서 1만 2,000권이 무난히 한국으로 보내졌다. 이 운동을 통해 미 전역의 한인 대학생들간 네트웍이 형성됐고 뉴욕에서 유학생들의 맞형 역할을 하던 백선기는 이무렵 민우회라는 학생 서클을 조직하여 주1회 토론그룹으로 이끌었다. 만나는 장소는 뉴욕한인교회나 학생들의 아파트였고 토론 주제는 주로 세계정세, 학생들의 당면문제, 그리고 때마침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이 서클의 핵심멤버는 백선기였고 이들은 가끔 뉴욕타임스 등에 한국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논조의 서신을 띠우기도 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은 4.19 학생혁명으로 무너졌고 이때 민우회 멤버들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있던 유엔 한국대표부에 몰려가 학생들의 희생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학생들의 참여가 늘어 30여명 정도의 토론그룹이 운영되던 1963년 광복절에는 8.15를 이성적으로 객꽌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명제 아래 당시 뉴욕에 있던 지식층 인사들을 망라한 6.3학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뉴욕에 생긴 최초의 한인학회였던 셈이다.
이때 학회를 주도한 인사들은 백선기를 비롯하여 노재봉, 김주봉, 김신행, 차인석, 김일평, 김영근, 손창문, 어윤배, 김상중, 홍원택, 김경원, 유세희, 이형, 김정원, 차대웅 등이었다. 회원중 상당수가 본국에 돌아가 국무총리와 대사도 이들 중에서 배출됐으나 변호사 손창문과 뉴욕시립대학원 교수로 있던 김영근이 현재도 뉴욕을 지키고 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을 휩쓴 한국 선수단. 뒷줄 오른쪽부터 코치 손기정, 함기용 우승자, 트레이너 백선기, 앉은 오른쪽이 2 위 송길윤, 왼쪽이 3위 최윤칠.
백선기는 일제시대 독립투사로, 해방후에는 야당지도자로 활약한 백남훈의 아들로 1927년 도쿄에서 테어났다. 4세때 귀국, 경남 진주에서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 동경의 명치대학 상학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해방을 맞았고 1948년 오클라호마주 필립스대학으로 도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명치대학 수학기간을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고 졸업을 앞둔 1950년 4월, 한국 마라톤 코치 손기정으로 부터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하는 한국선수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달려왔다.
손기정으로 부터 현지에서 한국팀 트레이너로 임명된 백선기는 선수들의 온갖 뒷바라지를 했다. 4월19일 열린 이해의 보스턴 마라톤에서 한국선수들이 1,2,3등을 석권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등 함기용, 2등 송길윤, 3등 최윤칠 선수가 차례로 결승점에 들어오자 보스턴 시민들은 물론 전세계 언론들이 흥분했다. 이때 ‘세 한국선수들의 행복한 미소’라는 캡션 아래 선수들이 활짝 웃고있는 사진을 3단 크기로 싣고 1면 톱기사로 장식한 1950년 4월20일자 보스턴 포스트지의 내용을 백선기에 포커스를 맞춰 추려본다.
“한국의 세선수들이 1등부터 3등까지 차지한 뒤에는 백선기라는 필립스대 한국학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이 학생은 일본 명치대 시절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한 경력이 있으며 손기정으로 부터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보스턴으로 달려온 사람이다. 그는 1주일간의 강의를 포기하고 오클라호마주 스틸워터로 부터 히치하이크로 보스턴에 도착했다. 그는 마라톤 경기에 대한 모든 상세한 내용을 코치에게 알려주었다.”
이때 우승을 차지한 함기용 선수가 자칫 실격 당할뻔 했던 사실을 고백한 일화도 같은 신문에 실렸다. “골인지점 4마일쯤 남겨놓고 내 다리는 나를 무척 괴롭혔습니다. 근육이 타이트해져서 심한 고통이 따랐는데 뉴톤이라는 동네에 들어서 커먼웰스 애비뉴와 센터 스트릿의 교차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코스를 혼동해 잠시 벗어났었습니다. 그때 트레이너 백선기가 달려와 큰소리로 나에게 오던 길을 되돌아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선두에 있었기 때문에 코스를 이탈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되돌아가서도 나는 선두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대구 육상선수권대회에서 케냐 선수가 코스를 이탈해 실격당한 사건을 연상시키는 일화였다. 60년전 보스턴에서 일어났던 한국 마라톤의 경사는 그러나 한달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 뉴욕의 학생사회에 많은 화제를 남긴 백선기는 그후 한국으로 돌아가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두원산업이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했고 지난 2006년 타계했다. 유족으로는 오클라호마에서 결혼한 부인 김복희(성악가)와 두남매가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아들 백충현은 SAT, AP, GRE, 토플, 토익 등을 제작하고 스코어링을 집행하는 ETS의 재무담당 상임이사로 있고, 딸 수정은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의 바이얼리니스트인 김현우와 결혼해 버지니아에 살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