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피아니스트 세계 최초로 작년 11월에 발매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음반. 지휘자는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원래 구약에 나오는 ‘삼손’처럼 거대한 힘이 나오는 사자 갈기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2009년 링컨센터 재기무대에 그 긴 머리를 다 잘라내고 참신한 숏커트로 나타나 더욱 깊어진 연주로 대중을 감격시켰다. 서혜경을 사랑하는 뉴욕 한인들은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다. 그 서혜경이 이번에 다시 또 도전한다. 그의 지난 세월을 들어본다.
▲여성최초 명반 녹음 중
“요즘 차이코프스키와 그리그(Grieg)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 9월 4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16일 뉴욕에 돌아온다. 여성 피아니스트로서는 세계 최초의 녹음이 될 것이다.”고 말하는 서혜경씨, 젊은 시절 날고뛰던 짱짱한 목소리가 그대로다.작년 11월에 발매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역시 여성 피아니스트로서는 세계 최초였다.
서혜경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10대는 피아노와 함께 옥탑 방에 갇힌 공주, 20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당당한 철부지, 30대는 인생의 고해에 뛰어들었던 시절, 40대는 완벽한 소리를 찾아 순례의 길을 헤매던 중 하늘이 준 시련과 선물을 동시에 받았고 50대는 희망과 긍정으로 새로운 도전과 봉사를 즐기는 10년이 되고싶다”고.“20대에는 열정, 스피드, 테크닉이면 최고이고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 3번, 차이코프스키 1번,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 브람스 등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곡들을 많이 연주했지만 음악의 감동은 열정과 스피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피아노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소리를 끄집어내는 연구를 오랫동안 했다. 이제 가장 강한 피아노 소리와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들을 조화롭게 연주할 수 있다고 자부할 즈음에 암에 걸렸다.”고 말한다.
그는 2006년 발병한 병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는데 이는 그것을 멋지게 극복해냈기 때문이다.“음악적으로 참 행복한 순간이 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어 합일이 될 땐 무아지경이 되어 승천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가끔씩 있다. 독일 프랑크프루트 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 1번을 할 때,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와의 라흐마니노프 4번 등 특별한 무대들이 몇 번 있었다. 유방암 수술 후 2008년 1월 한국의 재기 무대도 특별했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난 지 4개월만의 연주회였는데 끼니마다 현미밥 210g과 나물 몇 점으로 버티며 연주회를 준비했다. 2,000명 이상의 청중들이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연주장을 떠났다고 들었다. 나도 ‘해냈구나, 다시 살아났구나’ 하는 느낌을 정말 실감했고 참으로 행복했다.”
그동안 연 40회 지구촌을 오갈 정도로 연주회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아프고 난 후부터 조심하고 있다. 40회를 20회 정도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그의 표현대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0대다.“판단력을 상실하면 결혼을 한다는 우스개가 있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와 멀리 떨어져 피아노 밖에 모르던 시절에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여 참 힘이 들었다.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3~4년 동안은 거의 무직 상태라 경제적으로도 참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이 둘을 기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이들은 하늘의 축복이고 내 인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아이덕분에 세상 살 맛 나
1960년 아버지 서원석(성원제강 회장), 어머니 이소윤의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서혜경은 적극적인 엄마의 후원으로 새벽 5시에 깨워져 피아노 연습을 했다. 각종 콩쿠르에서 1등한 후 9세때 데뷔, 한국국립교향악단과 협연했다. 그리고 불과 열네 살에 줄리어드로 유학 온 후 외롭고 힘든 유학시절이 시작되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려면 전화국의 교환원에게 신청 하고 몇 시간을 기다려 잠깐씩 통화를 하던 시절이다. 보통사람들 월급이 10만원도 안되던 때에 통화료가 1분에 몇 천원이었다.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피아노 밑에서 잠깐만 누워 쉰다는 게 그대로 잠이 든 적도 많았다.”현재 서혜경은 경희대 음대 교수로 일하며 연주여행을 다니는 엄마를 이해하고 오히려 돌봐주는 아이들 덕분에 세상 살 맛이 난다.
“딸 문정이는 브롱스 사이언스 고교에서 전교학생회 부회장을 했고 태권도 뉴욕 주니어 대표로 전국대회에 나갔었다. 지금은 보스턴 유니버시티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고 아들 준범이는 뉴욕예술고교인 La Guardia고교 2학년이다. 미술과 조형에 특별한 집중력을 보여 그 학교로 보냈는데 외할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자라면서 사업가적 측면도 많이 보여서 엄마로서 진로 문제에 고심 중이다.”그동안 매그노국제콩쿠르 우승, 뮌헨콩쿠르 2위, 윌리엄 퍼첵상, 카네기홀 선정 세계 3대 피아니스트 등 각종 상을 수없이 받으며 화려한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가 가장 아끼는 상이 있다.
“1980년 부조니 콩쿨이 제일 기뻤다. 서양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의 텃세를 뚫고 우승했기 때문이다. 나를 입상시키지 않으려고 예정에 없던 본선을 추가해서 본선 심사를 두 번이나 당했던 콩쿨이다.”그는 약소국의 설움이나 인종적 차별을 당할 때마다 ‘나도 피아노에서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는데 최근 국사필수과목 홍보대사를 맡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급행열차에서 완행열차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무얼 했을지 짐작이 안 간다. 취미생활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피아노 땜에 뭉치는 어깨와 등의 근육을 풀기 위해 수영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찬사에 길들여져 있던 그가 지난한 삶을 살아오면서 인생관이 많이 달라졌다.“아프고 나서부터는 가능하면 정신적으로 여유있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급행열차에서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뉴욕 한인들이 서혜경의 미국 주류 사회로의 진출에 신경을 써주어 고맙다”며 “한인들과 만남 요청은 자주 들어오지만 올해는 정말 짬이 없다. 11월 5일, 6일 시애틀과 뱅쿠버에서 연주회가 있고 내년 3월 2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일정이 잡혀 있다.”고 밝힌다.
그는 요즘도 평균 5시간 연습한다. 연주회를 앞두고 하루 16시간을 연구하고 연습하기도 했다. “친구도 없이 혼자 유학생활을 하며 우울과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쾌활함은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말을 명심하고 항상 긍정적이고 즐겁게 살려고 애를 쓴다.”는 서혜경, 그 피나는 노력이 눈에 보인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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