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뉴욕의 한인들. 앞줄 오른쪽부터 한복입은 김자경, 의사 임길재, 시인 모윤숙, 뒷줄 오른쪽 부터 황재경 목사, 김자경의 남편 심형구 화백, 손원일 제독.
1986년 여름. 서울 자하문밖에서 문화촌 쪽으로 넘어가는 터널을 지나 오른쪽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자 김자경 오페라단 사무실이 있었다. 그때 70세라고 자신의 나이를 밝힌 김자경은 소녀같은 감상을 잃지 않고 2시간 정도 걸린 인터뷰에 자세 한번 흐트리지 않았다. 그만큼 건강도 했으려니와 30여년전 뉴욕생활에 얽힌 강한 열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1948년부터 10년동안 뉴욕에 살면서 30대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스토리들을 구김살 없이 토해냈다. 성공한 성악가로서 감추고 싶은 사소한 일들도 있었으련만 주저하거나 전혀 부끄러워 하는 내색도 없었다. 유학생으로 왔다가 6.25사변으로 연장된 뉴욕생활이었지만 그는 한번도 임시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항상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줄리어드에 다니면서 생활방편으로 봉제공장과 보석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했지만 일터에서도 그의 적극성이 돋보여 경영자로 부터 신임을 얻곤했다.
위키백과에 실린 김자경의 초반부 인생 경력의 일부를 소개한다면 1919년 개성에서 태어나 원산 누씨고녀를 거쳐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서울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고 한국 최초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상연했다. 이화여전 교수로 있던 중 미국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1950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바로 이 시기가 그의 뉴욕생활 중 하일라이트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당시 뉴욕의 한인 커뮤니티는 그리 크지 못했다. 한국 공관으로 한해 전에 정부가 구입한 뉴욕총영사관 건물이 80가 5애비뉴(9 E. 80 St.)에 있었고 콧수염을 기른 남궁염 총영사가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임병직이 대사로 있던 유엔대표부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세들어 있었고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에는 유창순에 이어 김정렴이 다녀갔고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는 황재경 목사와 아나운서 호기수 등이 있었다. 오래된 교포들로는 김배세 부부, 김형린, 서상복, 강한모 등이 있었고 윤응팔 목사가 시무하던 뉴욕한인교회는 커뮤니티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젊은 층으로 컬럼비아대와 뉴욕대에 다니는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맨하탄 어퍼 웨스트로 불리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548번지 김자경의 아파트는 주말이면 한인들로 북적였다. 병원 레지던트로 있던 이화 선배 임길재는 주말이 멀다고 찾아와 외로움을 달랬고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 근무하던 박준규, 운크라 사무소에 파견나와 있던 최인규, 한국은행 유창순, 유니언 신학교에 다니던 강원룡, 컬럼비아대학에 다니던 이동원도 단골손님이었다.
조금 늦게 줄리어드에 입학한 피아니스트 한동일도 김자경의 아파트 방 하나를 얻어 기거했다. 음식 솜씨가 좋은 김자경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주로 김치, 깍뚜기 밑반찬에 불고기 냉면을 대접했다. 손님치레를 위해 마련된 대형 고물 냉장고에는 그당시 정육점에서 아주 싼값으로 살 수 있었던 소꼬리나 소내장, 생선 머리등이 잔뜩 얼려있었다. 이를테면 김자경의 아파트는 본국의 소식이 전달되고 유학생들이 고생담을 쏟아내던 뉴스의 광장이었던 셈이다.
그와같이 자주 손님치레를 했던 김자경은 생활비가 많이 들었다. 그당시 주 수입원은 ‘원 월드 앙상블’이라는 다섯명이 한그룹이 된 음악 투어를 통해 얻은 수익금이었다. 이 투어를 통해 김자경은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한국이란 나라를 미국사회에 알리는 전령사 역할도 했다. 또다른 부업으로 김자경은 브롱스에 있던 봉제공장에 취직이 되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자경은 몇년씩 경험을 쌓은 기능공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능률을 내기 위해 재봉일을 하는데도 피아노를 치듯 하나 둘 셋 박자까지 맞춰가며 리듬있게 일을 하니 힘도 덜 들고 그를 따를 기능공이 없었다.
분업인지라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꺼리가 달리고 뒷사람은 산더미처럼 일꺼리가 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인들 사이에 김자경이 바느질을 해서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이 퍼졌다. 후에 대학교수가 된 사람, 요직에 앉게 된 사람들도 그때 김자경을 따라 모두들 봉제공장에 다녔다. 1970년대 이후 뉴욕 한인사회에 주요 노동시장으로 등장한 봉제공장의 시초였던 셈이다. 욕심이 크게 없었으므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는 못했던 김자경은 뉴욕생활 10년만인 1958년 귀국했다. 군인들이 접수했던 옛집은 총탄자국으로 구멍이 사방에 나 있었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그는 이화여대에 복귀했다.
남편 심형구 화백은 미술대학을 창설했고 김자경은 음대 성악과장이 되었다. 열심히 후진들을 양성했고 국내외를 통해 90회 정도 독창회를 갖는 등 음악활동을 펼치면서 평소 꿈꿔오던 오페라단을 68년에 창단했다. 당초 김자경은 성악가로서 대성하려는 원대한 꿈을 안고 뉴욕땅을 밟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
극 ‘춘희’의 주역을 맡아 명성을 얻은 때였으므로 꿈이 한껏 부풀어 있었고 그는 줄리어드를 발판으로 라 스칼라좌의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목적으로 뉴욕에 당당하게 왔는데, 와서 보니 기가 막히더라고 필자에게 실토한 적이 있었다. 여느 성악가라면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라서 비밀로 해야 할 일이겠지만 릴리 폰즈, 탈리아비니 등 국제적인 성악가들을 이곳에서 직접 만나보니 자신은 우물안 개구리만도 못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먼지만도 못하다는 자책감을 느낀 어느날 저녁 일생을 통해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다고 했다. 자살할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고 그대로 귀국할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밤새 울면서 기도에 매달렸던 그에게 새벽녘쯤 귀에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너는 욕심장이다. 너만이 세계 제일의 성악가가 되려는 자만을 버려라. 너만 잘되기를 바라지 말고 더 많은 일류 성악가들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것이 더욱 보람된 길이 아니겠느냐” 그와같은 계시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날이 밝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발성법이었다. 일류 가수들은 어떻게 그런 목소리를 내는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이었다. 혼자 연구도 했고 훌륭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도 받았다. 공명과 호흡을 이용해서 성대를 다치지 않고 좋은 목소리를 내는 발성법도 연구했다. 10년이 걸린 발성법 연구 결과 그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김자경에게 있어 뉴욕 10년은 봉제공장과 보석공장 등 손노동에 의한 부업전선과 발성법의 대가로서 우뚝 서게 된 단련의 시기였다.
그와같은 목표 수정은 김자경에게 새로운 꿈을 안겨주었고 그 꿈은 또한 후진들을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김자경 오페라단 창단으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성악가로서, 오페라단 단장으로서 일생을 보낸 그에게 한국정부로 부터 국민훈장과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등이 수여됐다. 지난 1999년 80세를 일기로 그는 갔지만 김자경 오페라단은 창단 42주년을 맞아 그의 아들들에 의해 오늘날도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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