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끼고 바람이 부는 날. 다운타운의 화랑 옆 커피샵에서 화가 오지영을 만났다. 16살에 미국에 왔고 22년간 작업해 왔다고 한다. 어렸을 적의 그녀는 무척 순진하여 그녀를 만나고 나면 고개가 갸우뚱해지기고 했는데 시각 예술에 오래 전념해온 그녀의 이마는 냉철하고 눈빛은 맑았다.
‘바람’이라는 제목의 작업 <사진, Mixed Media 1999>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바람은 스스로 형체가 없고 흔들리는 나뭇잎들, 머리카락, 치마폭의 날리는 장면으로 기억되며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오지영은 얇은 하얀 천이 날리는 듯하게 배치하여 바람 부는 날의 공간을 표현했다. 몇 개의 기둥이 공간의 다른 차원을 구성한다.
오랫동안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스튜디오에서 화가는 실험과 실험을 거듭한다. 아주 깊이, 사물과 의식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포착하는 고독한 행위 끝에 ‘우연히’ 하나의 시적 사물이 창조된다.
성좌가 하나/ 망각과 기능정지로 차가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는 아니나/ 그 어느 텅비고 높은 표면에서/ 계속적인 충돌을/ 별에서 오는 것처럼/ 총체적 계산으로 모양을 만드는 데/ 밤을 새면서 /의심하면서/ 회전하면서/ 빛나면서 그리고 명상하면서/ 그것을 축성하는 그 어느 최후의 지점에 멈추기 전에/ ‘모든 사유’가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를 만들어 낸다
<말라르메,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
오지영에게는 그녀만의 독특한 시적 감각이 있다.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분석하고 조합하여 그녀만의 특이한 조형물들을 창조한다. 색체 배합을 하거나 새로운 재료들(사진, 천, 합성수지, 에어브러시)을 사용하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그녀 마음에 떠오른 심상을 집중적으로 사유하여 그녀만의 시각적 ‘결정체’를 창조한다.
그녀의 작업에 견고하고 확실한 존재감이 있는 이유는 그녀가 오래 사유하고 고심하여 그녀로써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하여 그녀의 작업은 고독하고 견고한 미스테리의 영역에 존재한다. 서로 고립 되어 있는 듯, 화랑의 벽에 고독히 서 있는 하나하나의 오랜 고심의 산물들인 그녀의 창조물들은 그림, 화랑, 대중, 그리고 현대라는 시대를 숙고하게 한다.
그녀의 작업이 현대적인 이유는 소재가 현대적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견고한 성 같은 그녀의 작업이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 알 수 없는 거리와 고독감에 있다.
욕망되기 위하여 그녀의 작업은 반짝이는 투명성 물체의 의상을 입고 있다. 대중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색조가 더 선명히 느껴지고 매끄러운 수지(resin)로 끝마무리를 한다고 그녀가 말했다. 일종의 유혹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작업이 누군가의 벽에 걸렸을 때, 그녀의 작업의 진정한 매혹은, 쉽게 문을 열지 않는, 오랜 사유와 고심의 비밀이, 그녀에게는 구체적이고 확실하기에 더욱 특이한 지점에 머무르는 거리,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심미적 거리감에 있다.
사라져 버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 부는 날의 풍경 앞에서 현대인은 고립
감과 함께 남겨진다.
사라지는 것들을, 견고히 붙들어 형상화하는 그녀의 오랜 사유와 창조의 시간들
에 경의를 느끼며 뇌리에 오래 남아 맴도는 아름다운 바람의 이미지를 기억한다.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가벼운 하얀 깃발들이 어디든 곧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좋은 그림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게 한다고 누군가 말해 준 적이 있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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