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교협 ‘2010 목회자상’ 수상
▶ 49년 목회 한길...진정한 구제 사역 지금부터
경제가 어렵고 인심이 각박해지면서 존경할 것이 점차 사라져가고 참스승이 그리운 이때, 49년간 목회자로서 한 길을 걸으며 지난 1월 뉴욕교협 선정 2011 목회자상을 수상한 효신장로교회 방지각 원로 목사를 만나 그의 삶을 들어본다.
▲시련당하면 기뻐하라
“96년 9월 24일 새벽기도에 가려고 5시45분경 교회에 도착하니 경찰차, 소방차가 잔뜩 와 있었다. 한 교인이 뛰어와 ”목사님, 교회에 불이 났어요“ 했다. 가스 폭발 사고로 145만 달러를 들여 지은 교회가 폭 주저앉아있는 것을 본 순간, 그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온 건물이 박살났지만 종탑의 십자가와 종탑에 쓰인 ‘효신장로교회’ 이름만 고스란히 남아 모든 뉴욕 한인들을 놀라게 했던 그 일은 아직도 불가사의로 전해진다.
사고현장에서 방지각(75) 목사는 교회를 짓기 위해 교인들이 수없이 바자회를 하여 고추장, 김치 장사를 하던 일이 떠올라 기가 딱 막혔다. 그때 성령의 말씀이 들려왔다.“방목사야. 그동안 설교 다니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느냐?”정신이 번쩍 난 그는 박살이 난 잿더미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양손을 들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이같은 시련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다. “당장 500명의 교인들이 어디서 예배드리나 했는데 불타고 있는 와중에 쪽지가 들어왔다. 샌포드 149가 성공회에서 자기네 교회에서 예배 보라는 것이었다.”이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중남미 코스타리카 지역 선교사는 전화를 해서 “목사님, 여기 200명이 모이는 교회 하나 지어주세요.” 했다.
“소문 못 들었수? 우리 교회가 불 탔소.” 했더니 3일후 다시 전화가 왔다. “그래도 지어주세요”하면서 2만 5,000달러가 필요하단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 700여 한인교회 모두 불에 안탔는데 왜 우리교회만 불이 났을까, 이 전화는 사람이 아니다, 성령의 음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회의를 하여 “생각이 다른 사람은 손 드슈” 했다. 그 결과 교회가 불탔다고 다른 교회에서 거둬준 위로금 2만5,000달러에 교회헌금 5,000달러를 보태어 “잘 됐수다. 이것 갖고 가서 교회를 지으시오” 했다. 이는 ‘심은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100배로 갚아주신다는 믿음으로 시련 속에 기도하고 감사
하며 추진한 일, 그 결과 더 큰 은혜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후 1년 반만에 더 큰 교회를 짓고 교회 주위에 부동산 3개를 구입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현재 효신장로교회는 주일날 4부 예배를 보며 1,000명의 교인들이 참여하는 한인사회 대표적 교회로 성장했다. 지난 2007년 7월 은퇴를 앞두고 재정부 장로가 방목사에게 말했다.“다 두고 가시는데 한가지만 가져가시는군요 해서 내가 무얼 가져갑니까 했더니 교회의 빚을 다 가지고 가시지 않습니까 했다.”그 말은 콘에디슨과 보험에서 보상금을 받아 교회 건물의 모든 모기지가 해결되어 빚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꿈
“이 힘든 불경기와 시련을 이민자들이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교회가 위로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갈 때 긍휼의 마음을 꼭 갖고 가야 한다.” 그의 설교는 귀에 쏙 쏙 들어온다. 영화나 소설, 만화, 인터넷 어디서나 진솔한 예문을 찾고 ‘먹이기도 하고’를 ‘멕이기도 하고’로 살짝 이북 사투리가 들어간 강의는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하듯 쉽고도 구수하다. 누구나 알지만 느끼지 못하는 삶의 진리를 일러준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 30년 다닌 사람, 교인들은 다양한 처지의 합반이라 할 수 있다. 모두를 머리에 두고 재미있게 강의해야 한다.”는 방목사는 모든 설교 자료와 예문을 이날 이때까지 직접 찾고 해석이 달리된 성경책을 여러 개 보면서 준비한다.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려했다.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그는 평안북도 선천 태생으로 모태 신앙이다.“철산에서 농사짓던 방만준 할아버지가 선천에 선교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자 문중에서 쫓아내 구성에서 자랐다. 현재 사촌형 방지일 목사를 비롯 자손 중 22명의 목사가 나왔다. 우리가족은 아버지, 형님, 아들 두 명 모두 5명이 목사다”고 말하는 방지각 목사, 그는 어린 시절 늘 전도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 해방이 되고 춘천중고, 연대 신학대를 졸업한 후 춘천에서 20년동안 목회한 교회 이름도 효신(孝信)이었다.
당시 목회를 하면서 6.25전쟁 후 구두닦이나 관공서 급사로 일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고등공민학교(중학과정), 상업전수학교(고등학교과정)를 개설, 59년부터 20년간 운영했다. 그때 배출된 700여명의 학생 중에 목사 출신이 많으며 그들은 현재 인터넷에 ‘효신까페’를 만들어 “목사님께 올바른 신앙에 대해 배우면서 방황하지 않고 이만큼 성장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방목사가 뉴욕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 필라델피아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 공부 하러왔다가 뉴욕의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80명이 3년후 500명으로
“나는 한국에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는 마음은 “한국에는 목사가 많지만 여기는 없다”는 교인들의 진심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생 신분으로 영주권을 신청하니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우드사이드 교회는 3년간 방지각 목사를 한결같이 기다려 주었다.“처음 뉴욕에 와서 운전도 못하고 길 찾는 것도 어려워 고생을 했지만 수없이 심방을 다니고 기도를 하자 처음 80명인 교인이 3년후 500명이 되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교회를 보며 고생보다 재미가 있었다. ”고 지난날을 웃으면서 말한다.
1984년 4월15일 우드사이드 엠마누엘 침례교회당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것이 효신장로교회의 바탕이 되었다. 효신장로교회만큼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는 교회도 드물다. 이는 그의 뜻이다.“교회는 지역사회에 필요한 기관이 되어야 한다. 예수만 믿으면 다른 교회 교인 결혼식은 물론 노인센터 급식장소로, 교회를 개방하고 있다”고 하는데 부동산 박람회, 탈북자 위한 음악회, 새생명음악회, 학부모 협회 모임은 물론 스패니시와 중국인 모임도 이곳에서 치러지고 있다.
방목사는 교협 2대회장, 교협 초대이사장, 미주기독교 총연합회 대표 회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한인사회 어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은퇴후에도 한달에 한번 효신장로교회 정기예배에서 설교하며 도미니카, 니카라카 선교지 교역자 재교육에 힘쓰는 한편 월드비전 미동부지부 뉴욕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재난 당한 나라를 도와준다.요즘도 여전히 바쁜 방목사의 옆에는 1960년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한 박영숙 사모가 있다. 춘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연애반 중매반으로 결혼한 사모와의 사이에 세아들과 손자손녀 다섯을 두었다.집 앞 클리어뷰 골프장에서 건강을 유지하며 49년전 처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을 때나, 지금
이나,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묵묵히 한 길을 가고 있는 방지각 원로목사, 그에게 ‘은퇴’란 단어는 없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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