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훈<웨체스터 거주>
얼마 전 ‘들판의 백합’이라는 영화를 봤다.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티에 주연의 1963년 흑백영화다. 떠돌이 노동자 호머 스미스는 애리조나의 한 농촌 마을을 지나다가, 황폐한 농장에서 다섯 수녀가 힘겹게 일하는 것을 보고 숙소 지붕을 고쳐준다. 그런데, 자동차에서 새우잠을 자고 난 이튿날 아침에도 임금을 주는 기척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묻는 그에게 수녀 대표격인 마리아는
마태복음 6장 성경구절로 유식하게 대답한다. ‘들에 피는 백합은 하느님의 보상이 없지만 계속 핀다.’ 즉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했으니 ‘무료봉사’가 당연하다는 논리다. 그리고 덧붙여 농장 한 구석 땅에 성당 건물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한다.
어릴 적부터 건축가가 꿈이었고,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 꿈을 고이 간직해온 그는 남의 간섭 없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그 성당 건물을 짓는다는 조건으로 승낙한다. 면허나 정식 교육의 배경이 없는 그는 이것을 자신의 ‘평생 꿈’을 실현할 신이 내리신 절호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소가 없어 길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가 등장하고, 성당 건물을 짓고 싶으나 나설 용기가 없던 식당주인 후안을 비롯한 순박한 주민들이 돕겠다고 나선다. 스미시는 거절한다. 왜? 혼자 집 짓는 자기 ‘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마을의 건축회사에서 파트타임 중장비 기사로 돈을 벌어, 자재와 식료품을 사서 건물을 짓고, 자신 뿐 아니라 형편없는 수녀들의 식탁에 혁명을 가져온다. 이러다 보니 공사는 늦어지고, 스미스는 지쳐간다. 그걸 보다 못한 주민들이 반 강제적으로 돕고, 감동한 건축회사 사장이 자재를 무상으로 지원하여 드디어 성당 건물은 완공된다. 마지막으로 지붕 위에 십자가를 세울 때, 스미스는 십자가 바로 밑 시멘트 바닥에 자기 이름을 새김으로서 꿈을 이룬 표적을 남긴다.
준공 미사 전 날 콧배기도 안 보이던 신부가 손님들을 데리고 와서 자기가 지은 것처럼 생색을 내고, 수녀 마리아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오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그녀의 ‘강성 믿음’을 다시한번 과시한다. 그 뿐인가? 스미스에게 추가로 학교와 병원 건축을 요청한다. 이 법석을 지켜보던 스미스는 말없이 길을 떠난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평생의 꿈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루게 된 스미스, 남의 처지야 어떻든 간에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남이 받아들이기를 하나님 이름으로 강요하는 수녀 마리아, 손 놓고 있다가 차려진 밥상에 당연하다는 듯이 끼어들어 주인 노릇 하려는 신부, 성당 건축의 대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 놓고 헌신하는 후안과 마을 사람들, 스미스의 사람됨과 기술에 반해 후원자가 되었다가 수녀 마리아와 여러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떠난 회사 사장 등이 확실한 대비와 대조를 보이며 얽힌다.
원작은 에드먼트 바렛의 소설이다. 바렛은 ‘자기만 옳은’ ‘몰염치한’ ‘말만 앞서는’ ‘과실을 챙기는데는 유능한’ 세속형 성직자와 종교인들을 철저히 꼬집고 있다. 왜 그랬을까? 건물은 남고 남은 일들은 진행형인데서 영화는 잠정적 해피앤딩이지만, 씁슬한 뒷맛은 오래오래 두고 두고 남는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오랫만에 드문 감동을 준 감독 랄프 넬슨과 인간 군상의 실체를 극명하게 나타내 준 명배우 시드니 포이티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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