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60에 명예.재산 모두 잃고...제2 인생 시작
단돈 200달러를 들고 도미 31년만에 미연방하원의원이 된 김창준씨, 말그대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그에게 추락은 갑자기 찾아왔다. 삶의 의욕을 잃고 찾아간 고국의 인왕산 골목길에서 진달래며 개나리, 봄꽃이 눈에 들어왔다. 수중에는 달랑 200달러가 있었다. 화려하고 성공적인 삶의 절정에서 하루아침에 생의 절망 한가운데로 내려왔으나 여전히 ‘최초의’, ‘유일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본다.그는 오는 3월 24일부터 3일간 LA쉐라톤 호텔에서 한국일보 주관으로 열리는 제1회 한인정치
인 컨퍼런스· 리더십 포럼에 참여, 자신의 경험을 차세대에게 전달한다.
<60 나이에 새로 시작하다>
1992년 미이민 1세로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3선이라는 화려한 경력도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불법선거자금 관련 의혹이 물귀신처럼 그를 잡고 늘어져 결국 부인 준 김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36년을 살아왔던 결혼생활도 접어야 했다.한마디로 김창준 전 의원(72)은 "60 나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했다.신용카드 한 장 없이 집을 나온 김창준 전 의원, 그는 몇 달간 상당히 어렵고 절망적인 순간을 보내야 했다.“주머니에 달랑 200달러가 남아있었다. 미국에 올 때 들고온 돈도 200달러였다. 정말 죽으려 해도 총살 돈도 없었다. 피땀 흘려 이룩한 모든 것이 날아갔다.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 지 막막했다. ”막다른 길에서 그가 간 곳은 어릴 적 살던 인왕산 통인동이었다. 골목길에는 진달래며 개나리, 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텅 빈 가슴으로 꽃이 다가왔다. 춥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골목길에서 집착과 욕망을 모두 털어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미국에 돌아왔다. 다시 희망을 품고 왔다.
<연방하원의원으로서 한 일은>
그는 1961년 도미, 병원 청소와 지역신문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남가주 대학과 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여 1969년 졸업했다. 1977년 고속도로 하수처리 공사 설계회사 제이 김 엔지니어스를 설립하여 150여명으로 직원이 늘어날 정도로 비즈니스가 잘 나갔다.“최초의 정치활동은 70년대초 한미정치협회를 창설해 선거운동 및 모금 운동을 한 것이다. 2
세를 위해서라도 한인들이 더 이상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는 드디어 90년 4월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 바 시의원에 출마하여 한인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되고 다시 92년 캘리포니아주 제41지구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며 3선(제 103, 104, 105대)을 하였다.
“주로 정부공사심사위원회와 스몰 비즈니스 관련 일을 했는데 공화당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동양인이라 표적이 되어 무척 어려웠다. 외롭기도 했다. 하지만 20년 전 얘기고 지금은 다를 것이다. 그 당시엔 유일한 한국인이라 더욱 힘들었다. 파이어니어로서 어려운 길을 걸었지만 국회의원 하면서 많은 법안에 공동발의도 했고 또 많은 경험을 얻었다. 미국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게되었다”고 당시를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김창준 전 의원은 30년만에 금의환향 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이야기>
김 전 의원은 의원생활내내 LA 타임스를 비롯 ‘한국기업의 돈 선거자금 쓴 의혹있다“는 보도와 FBI수사까지 받아 지역구 사회 가십거리가 된 점에 대해서 심정을 토로한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내게는 이 가십이 계속 따라다닌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했지만 다 지나간 얘기다“며 애써 달관한 태도를 보인다.
“나를 위해 모금운동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아쉬운 점은 한인 커뮤니티가 더 성숙하기도 전에 내가 너무 일찍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에 한인들 간에 단결이 잘 안됐다. 유일한 아시안계 공화당 국회의원으로서 미 언론에서 두들겨 맞는 것도 억울한데 같은 한국사람들, 특히 한국 언론들이 마치 큰 범죄자나 된 듯 기사를 다룰 땐 참 섭섭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다 지나간 일이다”고.
<요즘 하는 일은?>
1993년 1월 4일 연방하원의원 선서를 하고 막 일을 시작한 그를 본 기자는 2월 22일 캐논의원빌딩502호 집무실로 찾아가서 인터뷰(본보1993년 3월2일자)를 했었다. 당시 하루 스케줄이 20개가 넘었지만 “일이 재미있고 해볼만한 일이라 고단한 줄 모른다”던 그가 요즘 어찌 지내는 지 궁금했다.“한국을 1년에 3~4차례 가는데 한국에 가면 미 국회의원 때만큼 바쁘다. 경기도 명예대사 일로 1년에 2번 정도, 주로 특강 요청을 많이 받는다. 날짜를 한꺼번에 잡아 한번 가면 한달정도 머물다가 온다. 일주일에 2~3번의 강의준비도 직접하고 칼럼 준비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초청행사에도 다닌다. 오히려 미국에 오면 좀 덜 바쁜데 이곳에서도 TV 출연, 행사 참석, 아내가 운영하는 IMS의 파이낸싱도 도와주고 있다.”
18년 나이차가 나는 재혼한 아내 제니퍼 안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홍보전문회사인 IMC를 경영하며 그가 시장일 때부터 기금모금 파티 등을 열어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제니퍼는 인정이 많고 낙천적이다. 앞으로 네가 나를 먹여 살려라 하고 1999년에 결혼했다. 마지막 로맨스고 멋지게 살다 좋은 흔적을 남기고 가려 한다.”버지니아의 김창준 전 의원 집에는 사람들이 자주 모인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워싱턴 포럼은 문화예술학술 정치관련 후원 모임을 사비로 연다.
“주수입원은 아내가 운영하는 광고회사 수입이고 한국에 가면 나도 강연비를 꽤 받는다.”는 김 전 의원은 작년 연말 뉴욕과 뉴저지를 방문, 자서전<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출간기념 강연 및 사인회를 하기도 했다.
아내 제니퍼 안은 “김의원은 화장실에서 조크 북을 잘 읽는다. 다 읽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서 써먹는다. 정치인은 적시적소에서 조크를 잘 해야 유권자들이 재미있어하고 귀기울여 준다는 것이다. 김의원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부지런함,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한인들을 돕고 싶다>
“미국 콩그레스 맨으로서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값지다. 역사의 한 장을 썼다는 자부심도 생긴다.”는 김 전 의원은 “정치에 뜻을 둔 한인을 돕고싶다. 나를 팔지 말고 그 지역구에 가장 필요한 것을 파악해야한다”고 조언한다. 한국과 북한, 미국 정치에 대해 그의 적확한 견해와 쓴소리를 듣고자하는 곳이 많다보니 따로 시간을 내서 LA만 가는 게 쉽지 않아 캘리포니아 지역구에 가본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애들과 손주가 있으니 조만간 식구들을 보러 갈 예정이다.
“하루건너 운동을 2~3시간씩 정기적으로 하고 있고 주말에는 가끔 골프도 친다. 워낙 술과 담배를 안하니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는 주말에는 교회와 중요한 모임 외에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즐겨부르는 노래는 조용필의 ‘허공’, 가수 조용필은 제니퍼 안씨의 큰형부이다.“2011년은 꿈이 이뤄지는 희망찬 한 해 같아 보인다.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고 내 산 경험을 후배들에게 더 나눠주고 싶은, 또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글과 강연을 더 많이 하는, 건강하고 뜻깊은 한 해가 되게 하겠다”는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 그는 여전히 우리의 자랑이고 긍지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1993년 2월 22일 캐논의원빌딩 집무실에서 만난 김창준 연방하원의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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