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폭우가 무섭게 쏟아졌다. 이 문명을 정화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마음을 적셔 주는 것일까. 밤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러한 해석은 필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깨끗이 바라보겠다고 생각했다.
비 개인 산에 올라가는 흰 구름은 장엄히 아름답고 겨울 공기는 싸늘하고 청명하다. 청회색 빛 하늘과 산, 물을 받아 살아 오른 나무들.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살아있음의 벅찬 기쁨을 느낀다.
오랜만에 후배에게서 새해인사 전화가 왔다. 어렸을 적부터 아끼던 후배인데 하도 진실하여 ‘나의 진리의 잣대’라고 부르곤 했다. 20대 말에 그녀와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5시간쯤 격렬히 토론하다가 내가 무릎을 꿇고 “네가 옳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시절은 나에게 진리를 말해다오, 진리로 나를 설득시켜 준다면 무릎을 꿇겠다 라며 서로 아끼던, 청춘의 기개가 뻗치던 시절이었다. 토론의 주제는 어떻게 사랑하는 가였다. 알콜중독이던, 도둑이던, 도박자이던 그 근본은 사랑의 부재와 사회의 구조에서 오는 만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고, 그녀는 나의 방식이 알콜 중독자에게는 술을 더 주고 도둑은 더 큰 도둑으로 만드는 방법이니까 교화하여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내가 지쳐 나가떨어지며 그녀에게 절을 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 무조건적 사랑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와는 한 20년 적조했는데 새해아침 전화해서 “언니, 나에겐 아무 희망이 없어”라고 말했다. “아냐, 절대적으로 희망이 있어. 희망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그 전율로 살아가면 희망이 이루어져.” 나는 열렬히 그녀를 설득했는데 사실은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게 기뻐서였다.
그토록 절실히 절망과 죽음을 얘기하는 진정한 목소리가 나에겐 그날의 희망이었다. 그녀는 타자에게 그녀 자신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나는 하루 종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희망이 없으면 죽음이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꿈을 꾼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슬로건은 우리 민족이 대동하는 한 순간, 우리의 가슴을 열광으로 뛰게 한 문장이다. 어둠이 깊으면 빛이 그만큼 더 밝다. 희망은 있다. 이것은 신의 말씀이고 인간 역사의 총체적 고통이 일구어낸 빛이다. 빛, 사랑, 자유 - 이게 희망의 모습이고 너의 심장 박동이 뛰고 있는 네 진정한 모습이다. …”
그날 밤, 조용히 누운 밤 2시에 비 오듯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내가 울고 있는 것인가,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인가. 차례로 삶의 고행에 던져져 상처 받고 길 잃고 소외와 절망에 시달리는 착한 친구들의 아픔이 전해져 다시 한참 뜨겁게 울었다.
새해 첫 주엔 두 명의 지인을 만났다. 예술가란 예수님의 마음을 지녀야 해,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살지 않는 이는 예술가라 할 수 없어 … 종교적이기 보다는 예술적이기를 원하는 나에게 그런 말씀을 서슴없이 해주시는 스승이 있는 게 고마웠다.
두 번째 만난 이는 나의 그림을 소장한 친구인데 다운타운의 어느 교회에 다닌다. 그 교회 사람들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기에 ‘묻지마 교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기성 교회들이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받아 들여 먹이고 살린다고 했다. 도박과 마약중독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이들이 그 교회에 함께 살고 그녀는 그이들을 돌보고 밥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물가에 서있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밝고 단단하고 조용한 그녀의 기품을 바라보는 게 무척 기뻤다.
인왕제색은 비가 개인 후의 인왕산을 그린 그림인데 겸재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렸다고 한다. 얼마나 슬픔이 깊었으면 이토록 힘차고, 얼마나 그 눈물이 맑았으면 이토록 비 개인 듯 맑을까. 고국 땅은 저 멀리에 있는데 그림 속 고국 산의 정기에 마음이 시원하다.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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