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에 출판된 한권의 ‘빛나는’ 책, 박영국의 전시 카탈로그인 ‘사막일지(DESERT)’에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공간의 세계를 표시하는 지도 같은 글이 있다. 그 치열한 모색이 가히 광기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안내서이다.
“사막은 미완성,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곳, 시간이 타 버린 곳, 서로 각자인 곳, 서로의 관심을 잊은 곳, 모래의 발사대, 포도주를 만들 수 없는 것, 정신의 용광로, 모더니즘이 녹는 곳, 원주민을 만날 수 있는 곳, 거친 껍질에 싸인 과일, 잔털 속에 물이 떨어지는 수밀도, 땅콩 껍질 같은 것, 달콤한 견과류와 같은 것, 색깔들의 공중목욕탕, 색들이 으깨지는 공장, 의로움 자체를 잊는 곳, 태양 빛을 선으로 볼 수 있는 곳, 인문학적 언어들이 증발하는 곳, 사고의 제재소, 대기가 날개를 펴는 곳, 사유들의 압력솥,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곳, 폐 속까지 건조해 지는 곳, 정신이 마비되는 곳, 대지의 힘들이 모여드는 곳, 출입구가 없는 곳, 비상구가 없는 곳, 축지법이 가능한 곳, 유목민의 고향, 환각이 필요한 곳 … …”
20년 전의 앤드루샤이어 화랑 전시이후 오랜 침묵 속에 작업하고 있는 박영국의 화실에서 돌아오는 프리웨이 위에서 ‘등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어둡고 광대한 바다에 홀로 서 있는 것, 정확한 시간에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배의 향방을 도와주는 것, 숙명적으로 고독하여 대양의 한 가운데 의연히 서 있는 것.
그의 화실에서 본 최근의 작업들은 ‘번쩍!’ 눈이 뜨이게 하는 등대의 빛이 보여준 세계, 그의 삶, 그의 존재, 그의 예술의 내면적 성찰이 보여주는 격렬한 마음의 광경이었다.
그는 그 세계를 ‘다른 세계’라고 말했다. 60이 지나도록 유유히, 자유로이 적적할 수 있는 치외법권적 시간의 권리를 보장받은 예술가로서 우주의 법칙으로 천지가 인간에게 준 혜택들 속에 내재하는 인간의 본능적, 원초적 힘을 세밀하게 찾아내어, ‘다른 세계’를 살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인도해주는 고귀한, 최고의 인간행위, 구체적으로 체득한 가장 개인적인 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 꽃 피운 세계, 스스로 전율하고 다른 사람을 전율하게 하는 깨어난 그 세계를 향한 도정이 예술가의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작업을 바라볼 때마다 그 ‘흰 빛’의 심원함과 심오함이 아련히 슬프다. 눈물을 거부하는 찬란한 정신. 의지에 홀로 서서 석양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그 시선의 맑음이 하도 밝고 예리하여 이민자인 우리들 모두가 서 있는 이 도시, 이 기막히게 밝은 태양, 절대적인 고독, 치열히 부닥치고 유쾌히 살아내어야 하는 축복된 땅의 은총이 벅차 느끼는 슬픔이 배제되어 초현실적이기도 한 그의 ‘다른 세계’엔, 그의 예리한 시선이 주시한 일광과 저 먼 바다 지평선의 파랑 색조가 시시각각 변화해 가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며, 또한 열렬히 자신의 내면과 세계의 밖으로, 우주적, 총체적 환영의 세계로 힘차게 우리를 인도하는, 세상사의 한 가운데 굳건히 뿌리박아 사유하고 꿈꾸고 행위하고 부셔버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오랜 손끝의 성찰은, 치열한 생존에의, 생명에의 의지를 통해 구축된 그의 구조물들은 그 추락과 상승의 궤적을 절절히 보여주며 스스로 소외하여 유유 적적히 먼 곳에서 빛나는 마음의 정원들로서 심원히 서있다.
50년을 추구해온 탄탄한 조형 행위 끝에 체득한 격렬하고 몽환적인 색체와 필치의 그 삶의 ‘실체’는 지난 100년의 미술사가 저지른 비인간화의 오류를 넘어선, 가장 고독한 예술가가 마침내 도달한 자신으로의 회귀의 장대한 광경이었다.
박혜숙/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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