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불이 나서 잠시 살았던 트레일러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 늘 창밖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있곤 했다. 공기가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물과 전기가 없이 등불을 의지하며 살았는데도 오히려 얼굴빛이 맑아지고 건강이 좋아졌었다.
불 난 집이 다시 지어져 돌아와서도 늘 그 아름다운 숲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숲은 가진 친구를 다시 찾아가 나무 그늘이 깊은 산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좋은 그림 그리셔야지요”라며 올리브 나무가 숲은 이룬 아름다운 장소를 정해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림을 쌓아놓은 창고와 그림 그리다가 쉴수 있는 방도 하나 마련하여 올리브 나무숲 그늘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 감사의 기도가 절로 터져 나온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무척 좋아하는데 숲속의 생활이 쓸쓸하게 느껴지면 세한도의 고결한 정기를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을 받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살림을 간결히 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한적히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것을 멋으로 알았던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드러나는 세한도는 들여다 볼수록 고결하고 맑은 정기가 느껴지는 데 한국 미술사에 이 그림이 한 장 있다는 사실이 무척 귀하게 여겨진다.
추사에게서 이 그림을 받은 제자 이상적은 “삼가 세한도 한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로 시작되는 감사의 편지를 올렸다는데 고고한 그림을 그린 추사와 그림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는 제자의 정신적 교우가 부럽기도 하다.
하루 종일 숲을 바라보며 숲의 아름다움에 감사하면서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하는 불안이 마음에 스쳐가기도 한다. 미술이 미술시장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은 최근의 일인듯 싶은데 그림에 빠져 세상사를 잊고 싶은 나에게 찾아오는 생활의 불안이다.
“좋은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되는 거야”라고 다짐을 하는 데 숲에서 그림을 그리니 온갖 벌레가 그림에 붙어 예기치 않은 난제를 푸느라 비닐을 쳐야 하나 캔버스를 쳐야 하나 요즘은 그 문제로 마음이 급하다.
때로는 스튜디오가 필요 없는 소프라노 가수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기야 오페라 가수에게는 피아노 반주도 필요하고 오케스트라와 관객도 필요할 테니 혼자서 창조할 수 있는 그림이 그 독립성으로 인해 다른 예술에 비해 더 자유롭고 깊게 순수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여러 스튜디오를 거쳤는데 샌타모니카 경비행장의 스튜디오에서는 울타리에 그림을 끈으로 묶어 놓고 그리다가 바람이 너무 세차 큰 그림과 함께 넘어져가며 그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스튜디오는 다운타운의 프리웨이 다리 아래에 있던 스튜디오이다. 조각을 하는 후배와 함께 구한 트레일러였는데 우리들은 트레일러에 갠지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피아노를 옮겨와 피아노 콘서트를 했었다. 그후에 들어간 스튜디오엔 수영장이 있었는데 3층에 있을 때는 그림이 잘 안나오다가 1층으로 옮기니 좋은 그림이 나와 그림이란 땅의 기운을 받고 서서 그려야 하는구나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조용하고 깊은 올리브 나무 숲속에선 어떤 그림이 나올지… 그전의 스튜디오에서는 콘크리트 벽의 회색빛의 영향을 받아 회색빛의 그림이 나왔었는데 온통 초록색의 미묘한 변화가 가득한 이 숲속에선 벌써부터 연둣빛 그림이 마음에 떠오른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아침 햇살과 저녁 석양빛이 민감하고 귀한 석양빛이 지면 등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는다. 유홍준이 쓴 추사 김정희에 관한 글을 읽으며 책의 곳곳에 빛나는 추사의 글씨에 경탄하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곤 한다.
박혜숙 / 화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