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절친했던 친구는 다운타운의 월렌보이드 극장의 디렉터였던 고 스캇 켈만(사진, 1936-2007)이다. 혼자서 스튜디오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나의 직업상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의 연극 웍샵에 들러 연극 연습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고 함께 연극을 하기도 했다.
1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미국에 와서 난 늘 아버지에게 무척 잘 있다는 거짓말 편지를 보냈었다. 큰딸이라 아버지가 걱정하실까봐 언제나 밝고 명랑한 편지만 써서 보냈고 마음엔 늘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유산 분배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의 편지만을 믿고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신 나머지 형제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 주셨지만 나만은 제외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난 두 가지를 잃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하나는 유산을 받지 못한 것이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에게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지 못함으로써 일생 아버지와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 아버지와 진실로 친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스캇 켈만은 나의 스승이자 친구였고 또 탁월한 예술인이어서 많은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한국에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아버지와 대화가 단절되고 오로지 거짓 위안 편지만을 써서 아버지와 진실로 절친할 수 없었던 상실의 느낌을 얘기하며 스캇 켈만이 언제가 죽을 때 100달러를 유산으로 남겨 주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심리적 상실감을 되돌릴 수 있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가 죽기까지 10여 년 동안 그와의 우정이 지속되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트럭 뒤에 20여명의 LA 시인들을 태우고 스캇의 주도로 참여한 다운타운 홈리스 시인들과 함께한 거리의 시 낭송회였다.
시를 쓰고 낭송하는 홈리스 시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멋진 모자를 쓰고 하얀 구두에 정장을 한 흑인 홈리스 시인이 일인당 3달러의 낭송회 참여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멋지게 자신의 시를 낭송하던 기억이 난다.
고르키의 ‘밑바닥 인생’이라는 연극이 다운타운의 한 극장에서 액터스 갱이라는 연극 그룹에 의해 공연되는 동안 동시에 헐리웃 공원에서는 홈리스 피플이 같은 연극을 공연한 적이 있었다. 두 개의 연극, 다른 연출가들에 의한 같은 연극을 스캇과 함께 보았는데 그와 나는 홈리스 피플이 잘 외우지도 못하는 대사를 떨면서 공연하는 게 훨씬 감동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기도 했었다. 그런 연극을 함께 볼 수 있는 친구를 둔 게 정말 기뻤었다.
스캇 켈만은 죽기 전 베니스의 일렉트릭 랏지에서 ‘타오 수프(Tao Soup)이라는 연극을 연출하고 스스로 출연했는데 20년전 스캇의 연극 웍샵에서 처음 만났던 모든 배우 친구들이 늙은 모습으로 관람석에 앉아 있는 모습들을 보며 기이한 감동을 느꼈었고 그의 공연은 LA 타임스에 대서특필 되면서 성황리에 끝났다.
그 작품을 관람하며 이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마지막 연극을 통해 탐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 데 그 공연 후 1년 만인 2007년 2월22일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그의 가족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더욱 놀라왔던 것은 그의 가족이 나에게 1만 달러의 유산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15년 전에 커피 샵에서 한 대화를 그가 잊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미국에 와서 늘 그리웠던 부모님과의 잃어버린 사랑의 세월을 그의 배려가 심리적으로 보상해주며 나에게 늘 문제가 되는 인간의 친애를 극적으로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그는 말론 브란도를 무척 좋아하여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함께 빌려 보기도 했다. 베니스의 로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곤 했는데 예술과 삶, 혁명과 문화를 깊이 얘기했다.
헤어질 때 윙크를 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난다. 아마도 어느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가 굿바이를 하는 모습을 재현했을 것이었다.
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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