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수정안과 관련한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다는 한 남성이 털어 놓은 얘기는 이렇다. 1번 문항서부터 잔뜩 수정안에 대한 장점을 설명하고 “수정안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더니 “원안대로 해야 한다”는 1번을, “과학과 교육으로 특화하여 자족기능을 강화하고 기업유치를 통한 고용창출로 지역과 나라에 발전이 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2번을 눌러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의견을 묻기 위한 여론조사라기보다 홍보를 위한 전화에 가깝다.
이 사례는 한국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받아들여지는 여론조사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론의 흐름을 살펴보는 풍향계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조사라는 이름을 덧입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만들어가려는 의도가 읽혀진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왜 여론조사가 과학으로 대접 받기 힘든지 그 이유가 확실히 드러난다.
여론조사의 허구성을 거론할 때 꼭 언급되는 고전적(?) 사례가 노무현과 정몽준의 대선후보 단일화를 위해 실시했던 2002년도 여론조사이다. 누가 후보가 되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두 회사를 고용해 실시한 조사에서 노무현이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두 조사의 결과가 표본오차를 훨씬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한 조사에서는 노무현 46.8% 대 정몽준 42.2%, 그리고 다른 조사에서는 노무현 38.8% 대 정몽준 37.0%로 두 조사 간 노무현 지지도 차이는 8%포인트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결과의 편차가 컸던 두 조사가 같은 질문지를 사용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설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질문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같은 질문지를 사용해도 어떻게 표본을 추출하느냐, 그리고 조사원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정확한 여론조사를 하려면 표본 추출에서부터 조사, 그리고 분석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이면서도 엄정한 방식이 적용돼야 한다. 가령 응답률이 너무 낮을 경우에는 무작위 표본이라는 원칙이 흔들리는 만큼 조사결과를 폐기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문화적인 이유로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길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해 보면 응답률이 미국의 경우보다 훨씬 낮다. 이럴 경우 결과 자체를 폐기해야 함에도 밑천 생각 때문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유효한 결과로 둔갑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에서 실시되는 여론조사들은 대개 유효와 무효의 경계선에 서 있다고 보면 된다.
이번 주말 설 연휴가 지나면 ‘설 민심’이라는 명분을 내 건 여론조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세종시 원안 고수와 수정안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진영은 민심의 향배에 승패가 달렸다고 보고 여론몰이를 위한 총력전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쏟아져 나올 여론조사 결과들이 민심을 정확히 반영하기보다는 각자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다. 조작과 왜곡의 유혹 앞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따로 없다.
20세기 최고의 언론인이자 언론학자로 꼽히는 월터 리프맨은 “여론이란 번쩍이는 이미지들의 결합, 표피적인 인상, 스테레오 타입, 편견, 이기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며 여론이 지닌 허구성을 경계했다. 리프맨의 지적은 미국사회를 관찰한 결론이다. 한국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조작의 수단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민심을 거스르면서 까지 무리하게 일을 시작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여론은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라는 오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번쩍이는 이미지들과 매체들의 호도 속에서 건전한 판단은 순식간에 휩쓸려 내려가 버린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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