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은 수모를 당하고 체면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청문회가 열리는 이틀 동안만 이를 악물고 견디면 총리에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을 정운찬 전서울대 총장이 다시 증명했다. 사회여론도 “그가 취약점을 지닌 것은 사실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그만한 인물 찾기도 힘들다”는 쪽으로 흘러 총리임명의 윤리기준을 낮추는데 눈을 감아준 것 같다. 말하자면 ‘정운찬 총리임명 결사반대’까지는 국민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청문회는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청문회는 국회의원들의 끗발을 과시하는 ‘망신주기 쇼’가 아니다. 제도를 만들었으면 그것을 과감히 실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정부가 요령주의를 시범보인 꼴이 되어 사회전반에 그 바이러스가 번진다. 예를 들면 자동차 신호위반이다. 서울에서는 새벽에 아무도 없으면 네거리에 빨간불이 켜졌는데도 버스와 택시가 그냥 달린다. 신호 기다린 사람이 바보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한국은 사회전체에 준법정신이 결여되어 있고 정의감이 부족하다. 아무도 안보는 데서도 법을 지키는 것이 준법정신인데 이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너무 빈약하다. 대통령, 총리, 대법관, 법무장관이 위장전입을 한 것은 국민의 준법정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다. 아무도 안보면 대학총장도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정도의 준법정신이다. 청문회에서 날카롭게 총리후보의 위법을 따지던 국회의원이 다음날 부정혐의로 의원직을 박탈당하니 이 얼마나 모순인가. 법을 만들어 놓고 법어기는 것을 눈감아 주는 국가라면 경제적으로는 G20에 속할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G40에 속하는 국가다.
미국 대통령 직속기관에 OGE(Office of Government Ethics)라는 것이 있는데 연방공무원의 윤리기강을 단속하는 부처다. 디렉터는 대통령이 임명하며 상원의 인준을 거쳐 임기 5년을 보장 받는 힘 있는 기관이다. 대통령도 외국으로부터 180달러 이상의 선물을 받으면 OGE에 신고해야 하며 국무장관을 비롯 모든 고위공무원이 출장비나 예산을 합리적으로 쓰고 있는가를 감시한다.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가족들과 먹는 식비는 자신이 지불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저녁에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먹었다면 자기부담이며 공식만찬만 백악관 예산으로 집행된다. 대통령이 여름휴가 별장을 빌리면 자비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경호원들의 체제비나 식사비는 국가가 책임진다. 이 모든 것을 OGE가 유권해석을 내린다. 최근 펜타곤 군수담당 고위직원이 자기 딸을 취직시켜 주는 조건으로 보잉항공사와 계약한 것이 드러나 OGE에 의해 형사 입건된 적이 있다. 정운찬 총리가 미 의회 청문회 검증을 거쳤다면 총리 부적임자 판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OGE는 칼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윤리에 관한 공무원 세미나를 끊임없이 개최(연간 25만명)해 준법정신을 계몽한다. 또 이들의 질문에 수시로 친절하게 답변을 보내준다. 예를 들어 서울대 총장이 외국여행 나가면서 “나하고 형제처럼 지내는 사람이 너무 궁핍하게 살지 말라며 5,000달러를 주었는데 이거 받아도 되는 겁니까”하고 물어보면 OGE에서 명쾌한 답을 해준다. 위법을 피하도록 사전에 도와주는 것이다.
이번 청문회는 한국이 얼마나 심한 도덕적 공해에 휘말려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박연차 사건에서도 그랬다. 혐의를 전부 부인해 놓고는 나중에 재판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회 -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그림이다.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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