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듯이//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 ”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 ‘별 헤는 밤’에는 시인이 사랑한 모든 이들이 하나하나 별처럼 가득하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타자를 얼마나 진실로 사랑했는가가 가치 있는 삶의 기준이 될 듯하다.
기억할 수도 없으나 무의식에서 가장 깊고 강렬한 어머니의 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의 증거인 인간, 그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극진한 사랑 속에서 자라나고 조상을 향해 올라갈 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우리를 사랑한 인간의 숫자가 늘어간다. 그 모든 조상들의 사랑의 결정체로 한 인간은 탄생한다. 우리들의 DNA에는 모든 조상의 사랑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사랑은 움직이고 유동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니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영원하지 않으니 더욱 지금 사랑하겠다고 한다.
때로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를 의문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가의 질문이다. 마음이 쓸쓸할 때에 ‘애정결핍’이라는 진단을 스스로 하는 데 사실은 타자를 향한 사랑과 관심의 결여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백지에 하나하나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이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힘겨울 때에 그 백지에 쓰인 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면 내가 사랑하고 관심을 지녀야할 사람들이 무척 많아 살아나갈 용기를 얻기도 하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은 사랑이 부족해서 문제이지 사랑해서 문제는 아닌 것이다.
나만을 사랑하라거나 너만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사랑의 신화 중 가장 거짓된 신화이다.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이 서로 빛나며 장관을 이루듯이 사랑은 근원이 깊고 나와 네가 없고 관계만이 빛나는 우주적 에너지의 흐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는 “심판은 나에게 맡기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인데 시대에 따라 사랑을 보는 시각이 달라 좋은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 숙고해보곤 한다.
우리는 현대에 태어나 일부일처주의로 살고 있지만 몇십년 전만해도 일부다처주의였는데 100년 후에는 어떤 사랑의 방식으로 변화해 나갈 지 궁금하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의 윤리의식이 다르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 다른 문화의 사랑의 가르침이 달라 다면적이고 다양한 사랑의 역사가 전개되어 왔으니 사랑은 쉽게 규정하고 정의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다만 이 생에 태어난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길을 배우러 온 것만은 틀림없다. 내 마음 속의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시니 사랑하기 위해 반항하고 항의하는, 거침없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며 죽어가고 싶다.
신 앞에 당당히 사랑의 상처로 고개 숙인 인간으로, 의문의 시간에 항의하고 호소할 수 있는 하느님을 마음에 둔 나는 행복한 반항아이다.
선명한 열정으로 온 우주가 다 깨어난 듯한 축복받은 사랑이 있는가 하면 사랑에 눈이 멀고 서로와 세계로부터 단절된 사랑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은밀한 사랑의 감정을 기억의 저 깊숙이에서 끌어올린 듯한, 사랑의 미스터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은 정직하기에 기이한 그림이다.
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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