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카냐다 북쪽에서부터 시작한 산불이 우리 집 뒷산 너머까지 번져왔다. 불길이 주택가에까지 내려오려면 족히 이틀은 걸릴 거라는 셰리프들의 위로와 집 앞에 소방차들을 대기해 놓고 계속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믿음직스런 소방대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웃들은 긴장된 얼굴로 여기저기 모여서 서북쪽 하늘의 연기기둥에 싸인 불길들을 관망하며 며칠을 지냈다.
산이란 정말 거대한 것이어서 마치 하늘의 달이 어느 곳에서나 똑 같이 보이듯이 옆 동네에 가서 바라보면 바로 그 동네 뒷산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고 우리 동네에 와서 보면 바로 우리 집 뒷산에서 활활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불길이 우리 집까지 내려올 것인지 그 거리를 통 가늠 할 수가 없었다.
닷새 째 되던 날 오후 불길이 어떻게 진전 되었나, 동네사람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 집 근처 이곳 저곳을 운전하며 다녔다. 불길은 계속 번지고 있어 그 범위가 훨씬 넓어졌고 이웃들은 아무 동요는 없었으나 차고 문들은 대부분 열어 놓고 있었다. 동네 입구에는 경찰들이 이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곧 이어 내 앞을 막더니 조금 전 대피령이 내려져서 내 집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아직 대피할 짐도 꾸리지 못했는데 난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섣뿔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웃들은 만약을 대비해 차고만 열어놓고 조용히 집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조금 후 우리 집 쪽은 자발적 대피령 지역인 덕분에 겨우 집으로 들어왔는데 이제는 무엇을 챙겨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남편에게 알리고 또 물건들을 좀 더 가지고 나가려면 아들의 차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웨스트 LA에 사는 아들을 빨리 오라고 했다.
차 3대에 잔뜩 실으면 꽤 괜찮을 것 같은 상상을 하면서 중요한 서류들을 우선 챙기고 나니 눈에 보이고 마음에 걸리는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다. 피아노, 러그, 대형 그림들, 가구, 그릇들……마음이 착잡했다. 그러나 곧 이러한 것들을 모두 잃은 후에도 내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나를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서예도구와 서예 책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들의 전화가 왔다. “엄마, 값 비싼 물건들이 아니라 다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챙겨야 한다는 것 아시죠?”
아들은 도착하자마자 나에게 묻지도 않고 위 아래층으로 다니며 벽에 걸려있는 나의 서예작품들을 둘둘 말기 시작했다. 비싼 물건들을 제치고 내 서예작품을 귀중히 여기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남편이 들어오길래 모든 것 다 놓아두고 서예에 관한 물건들을 우선으로 하는 내가 정상인지 물었다. “물론이지”라고 한다 아직 서툴기만 한 내 작품을 그렇게 생각해 주는 남편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늘 바쁘게 지내오던 사회봉사활동을 접고 이제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지식을 위해 마구잡이로 읽었던 책들은 모두 치우고 서예에 관한 책들만을 책장에 남겨놓을까도 생각했었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한데 모으며 손으로 붓을 놀리되 나 자신의 내면을 그리는 것이라는 서예.
아직 나에게는 멀고 어렵기만 해서 주저되던 서예는 결국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이번 산불이 깨닫게 해 주었다. 보잘 것 없는 내 서예를 귀중하게 여겨주는 주위 사람들을 생각해서도 좋은 서예를 익히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나의 내면을 닦아야겠다. 은은한 묵향이 풍겨질 때까지.
장경자 / LA 한인 가정상담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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