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현대사의 거목으로 불린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일생 자체가 한편의 영화다. 정보부에 납치되어 바다에 버려질 뻔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12.12 신군부 쿠데타 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목숨을 건졌고, 미국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극적으로 귀국할 때 암살을 각오했으며,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불가사의의 정치인이었다. 김대중만큼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정치인은 한국 현대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호남인들이 김대중을 우상화에 가까울 정도로 떠받든 것도 그가 당한 수난이 보통 수난이 아니라 죽음을 수반한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용기를 가지고 정면 돌파로 승부를 가려 소신 있는 정치인의 시범을 보였다. 이 점에서 같은 호남 정치인이며 ‘40대 기수’로 출발점을 같이 했던 이철승 씨와 성격을 달리한다.
‘김대중’만큼 핍박 받은 정치인이 있을까. 집권세력은 그에 대한 핍박을 정당화하기 위해 색깔론을 폈으며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교묘한 수단으로 보편화 시켰다. 필자가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때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구호는 없었다. 언제부터 이 딱지가 붙어 다녔느냐. 1971년 박정희에 맞서 대통령에 입후보한 직후부터다. 박정권은 이 선거에서 김대중과 호남에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으며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구조적 탄압은 호남에 집단적인 소외의식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김대중을 정치거물로 키워주는 역작용을 일으켰다. DJ는 호남차별의 최대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급속히 성장한 최대 수혜자이기도 하다.
김대중만큼 지역차별을 이론정연하게 비판한 정치인도 없다. 그는 월간지 신동아(95년 9월호)에서 지역차별을 인사차별, 지역개발차별, 문화차별 등 세가지로 분류했다. 문화차별의 대표적인 예로는 당시 인기 TV연속극인 ‘모래시계’를 지적했다. 극 속에서 비굴하고 배신하거나 사기성 있는 역의 배우들에게 모두 호남 말씨를 쓰게 한 것이 문화차별이며 이같은 차별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호남인의 한과 호남정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기 때문에 미주동포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많은 미주한인들이 그의 주변에서 참모 역할을 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뉴욕 한인회장 출신인 박지원 비서실장(현 국회의원)이었다. 필자는 DJ의 대통령시절 해외 한국 미디어의 인터뷰 불가 전례를 깨고 청와대에 들어가 그와 단독 회견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는 미주 한인사회에 대한 그의 특별배려 덕분이었다. DJ는 당시 국내 기자회견에서는 금기사항으로 되어있는 아들들의 잡음에 대해 기자가 질문하자 시원스럽게 대답해준 것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그러나 그는 민주투사이면서 내부적으로는 너무 비민주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낙점정치, 줄서기 정치, 불투명한 정치자금과 공천과정 등은 정당정치가 아니라 사당정치를 심어 놓았으며 도전자는 용서치 않아 후계자가 클 수 있는 자리를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호남의 ‘정신적 지주 부재’를 의미한다. 현재로는 그 자리를 메울 인물이 없다. 김대중은 한 시대를 풍미한 경륜있는 정치인이었고 누가 뭐래도 그는 준비된 정치9단이었다. 김대중을 떠나보낸 호남이 어떤 모양으로 다시 태어나느냐가 그의 사후한국정치의 최대 관심사다. 더구나 노무현까지 잃은 야당으로서는 정신적인 대공황기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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