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몇 걸음 앞선 역사의식과 현실감각으로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여러 차례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와 위기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였던 그였지만 병마와 고령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많은 이들에게 슬픔과 아쉬움을 남긴 채 홀연히 곁을 떠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내 몸의 반이 무너진 느낌”이라며 애통해 했다. 병원 입원 전 한 강연에서는 “노 대통령은 전생에 내 동생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에 대한 각별하고도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두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 반가운 얼굴로 해후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는 김대중이란 이름 석자를 빼고는 써내려 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비주류였다. 고졸 출신의 학력은 말할 것도 없고 출신 지역도 전라남도의 한 조그만 섬으로 한미했다. 한국사회에서 성공의 공식과 가장 거리가 먼 조건은 두루 갖추고 있던 셈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열악한 조건과 환경을 넘어서고 역사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 않는 끝없는 도전이었다. 청년 시절 당선이 보장돼 있는 목포 국회의원 자리를 저버리고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했던 것도 그렇고 45세 때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도전해 누구도 예상 못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도 그랬다. 이런 점에서 그가 동생처럼 여겼다는 노무현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김대중을 성장시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스스로를 작은 틀 안에 가둬 버리지 않는 자기 긍정과 이를 뒷받침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부인 이희호 여사는 자신의 자서전 ‘동행’에서 1962년 결혼한 남편 김대중에 대해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늘 책을 읽고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 비범한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김대중의 학구열은 유명하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서 5공 시절 남편의 2년6개월 수감 기간 중 동서고금 사상가, 신학자, 역사가, 미래학자, 예술가들의 책을 500권 이상 차입했다고 밝히고 있다. 3평 남짓한 감방에서 그는 탄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배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김대중의 서재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두 번 놀랐다고 한다. 서가를 가득 메운 3만권 장서의 방대함에 먼저 놀라고 책 하나하나에 깨알 같이 써져 있는 메모에 또 한번 놀란다는 것이다. 인문적 소양을 갖춘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 정치판에서 그는 공부하고 사색하는 아주 드문 정치인이었다.
시대의 안일함을 뛰어넘어 그를 남북화해의 전도사로 나서게 한 것은 이처럼 폭 넓은 독서를 통해 형성된 역사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서거하자 여야 모두가 한 목소리로 남북화해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정치권의 오랜 반목과 갈등이 조금씩 치유되는 모습을 보였다. 살아서 남북화해에 혼신을 바쳤던 김대중은 이제 죽음으로써 남남화해의 씨앗이 되고 있다.
김대중처럼 국민들의 애증이 확연히 갈렸던 정치인은 없다. 그가 받았던 비난은 자신이 초래하기도 했고 그를 경계하던 권력의 덧칠에 의해 조장된 측면도 있다.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인간 김대중은 비주류로서 주류의 냉대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며 도전에 나섰던 삶에 대한 태도를 또 하나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기고 떠났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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