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쇼핑의 거리’는 어디일까. 파리에서는 포부르 생 토노레 거리와 오페라하우스 근처가 꼽힌다. 로마에서는 스페인 계단 앞에 펼쳐진 콘도티 거리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로마나 피렌체보다 카프리 섬 산꼭대기에 있는 티베리오 거리를 더 알아준다.
이 모든 명품의 거리들은 베벌리 힐스에 있는 ‘로데오 거리’를 브랜드나 가격 면에서 따라오지 못한다. 로데오 거리는 불과 3개 블록으로 이어져 있지만 구찌에서부터 에르메스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상점 100여개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의류를 파는 상점은 샤넬 근처에 있는 ‘비잔’(Bijan)이다. 비잔은 예약 없이는 쇼핑하지도 못한다. 돈 들고 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 가게에 들어가는 손님들은 보통 10만 달러 규모로 쇼핑한다고 한다. 신사복이 평균 1만5,000달러, 양말 한 켤레에 50달러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이 세계에서 몰려들지만 로데오를 제대로 구경한 사람은 드물다. 로데오 거리는 항상 인파로 붐벼 렌트비도 미국에서 제일 비싸다. 입주를 희망하는 상인들이 줄을 서있어 건물주와 베벌리 힐스 상공회의소의 자격심사가 까다롭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엊그제 우연히 로데오 거리를 지나면서 보니 여기저기 빈가게다. 로데오에 빈 가게? 상상이 안 되는 기현상이다. 거리도 한산했다. 로데오는 절대 세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베르사체’에서 50-75%까지 세일하고 있었다.
80년대 초 레이거노믹스, 92년의 LA폭동과 부동산 파동, 그리고 2001년 닷컴 버블이 꺼졌을 때도 심한 불경기가 뒤따랐지만 로데오는 끄떡도 하지 않았었다. 왜냐. 베벌리 힐스는 부자들만 사는 동네이고 로데오가 그 중심 상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불경기는 달랐다. 상인들이 한숨만 내쉬다가 급기야는 가게를 문 닫는 최악의 사태에 이른 것이다. 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베벌리 힐스에서 영업하는 부동산 업자들과 가게주인들을 만나봤다. 결론은 이번 불경기에서는 부자들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돈 벌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주식시장과 커머셜 부동산이다. 그런데 주식과 부동산이 지금 바닥을 헤매고 있으니 베벌리 힐스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몇 백만, 몇 천만 달러씩 손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로데오는 중동의 석유부자들이 찾아와 돈을 뿌리고 가는 상가로 흥청댔는데 9.11 테러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로데오 상인들은 원, 투 스트레이트로 강펀치를 얻어맞고 비틀거리고 있다.
로데오 현상은 한인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민와서 뼈 빠지게 고생한 후 돈 좀 모은 사람들 대부분이 안전한 은행주식에 투자하거나 커머셜 부동산을 사들였다. 그러나 은행주식 값이 지금 말이 아닌 지경이고 상업 빌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테넌트가 야반도주 하거나 배 째라고 드러눕는 데는 아연실색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건물주가 은행에 꾼 돈을 갚을 도리가 없다. 여기저기서 건물 차압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사업에 성공해 모두들 부러워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돈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될 형편이다. 왜냐하면 주식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꿔 부동산을 샀기 때문이다.
미국경제가 회복 기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다른 한편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한국전쟁 때 휴전을 앞두고 백마고지의 혈전이 벌어진 현상이나 비슷하다. 사업가에게는 요즘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다. 이번 불경기에서는 살아남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승리다.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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