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빛의 정적 속에 한 소녀가 달리고 있다. 빌딩의 그림자는 화면을 가로 지른다. 빌딩 앞에는 바퀴가 달린 박스의 문이 열려 있다. 저 쪽에서 누군가의 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
드 키리코의 초현실주의적인 이 그림<‘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막연히 느끼는 소외감의 적막과 우울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단순한 구성과 이미지의 이 그림은 내면의 고독을 표현하기에 정신의 어떤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 발견되는 조형 감각을 지니고 있다. 막연히 느끼던 느낌을 눈앞에 드러내기에 낯설지만 낯익은 아름다움이 있다.
인생의 미스터리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꼭 같이 되는 법이 없다는 점, 바로 그 ‘차이’에 있다. 안정을 위하여 반복되는 일상의 직업, 인간관계를 구축하지만 그 속에서도 낯설음을 느끼고 또한 새로운 낯설음의 경험을 찾는 게 인생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데 무척 어려운 책을 좋아한다. 자꾸 읽으면 어떤 감이 오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격렬히 탐구하며 읽게 하는 책을 좋아한다.
요즘 나오는 인문학 서적들엔 잡다한 정보는 많지만 준엄한 정신이 부재하고 숙고하게 하거나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맛이 없다. LA 카운티 뮤지엄에서 본 최정화의 플래스틱 용품들의 잡다한 다발들처럼 재미있는 듯 하지만 내용이 없는, 요란하며 싸구려 잡화상 같은 정신이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물량주의적 정신이다.
아마도 최정화는 낯 설은 것 보다는 낯익은 것을 쌓아놓고 즐기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LA 카운티 뮤지엄의 한국 작가전을 친구들과 함께 보며 우선은 한국인의 작업을 좋은 전시공간에서 바라보며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낯 설은 대지와 대기 속에서 캘리포니아 자연의 빛 밝은 은총과 한국과는 다른 툭 트인 공간 감각에 익숙한 내가 바라본 한국 미술은 어딘지 칙칙하고 답답하다. 한국에 가면 느끼는 낯익은 답답함은 2층 전시장을 보고 3층에 올라가 얼마나 느낌이 다른 가를 느껴보면 알 수 있다.
서도호는 아주 얕은 비유로 자신과 관객을 현혹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이다. 한옥과 양옥, 낙하산의 비유가 그의 작품의 의도라면 좀 더 풍성한 상상력이 아쉽다. 양혜규의 박스들은 몇 십년전 앤디 워홀이 쌓아놓은 박스를 한국식 박스로 대체시켜 놓은 느낌이다.
그중 가장 신선하고 진지한 작업은 김홍석의 작업이지만 벽에 글자를 써놓은 방식은 치기를 느끼게 한다.
“우린 꼭 한 끗발이 부족해. 그걸 찾아내는 게 우리 문화의 갈 길일거야”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친구들 모두 박이소의 작업을 좋아했다. “죽었다지?” “왜 죽었을까?” “우울증이었대…”
전등사진이 있는 멋진 포스터를 바라보며 왜 그토록 좋은 작가가 일찍 죽었는지…서글펐다.
요즘 읽는 책 중에 무척 낯 설은 책이 있다. 펠릭스 가타리의 기계적 무의식, 분자 혁명, 정신분석과 횡단성, 카오스모제이다. 함께 책을 쓴 질 들뢰즈가 ‘번개를 맞은 듯’ 했다는 가타리는 분명 신선한 천사임에 틀림없다. 생생하고 빠르고 적극적이고 혁명적이고 행동적이다.
온 생을 다하여, 벅차게, 인간의 존엄성을 사랑하고 자유와 주체성을 다시 일으키는 인간들은 분명히 한 세기의 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천사들일 거라고 난 생각하길 즐겨한다. 분명 우리들의 삶을 관찰하면 드러나는 생명의 율동에 관한 얘기일 텐데, 자본주의의 한계에 부딪쳐 고뇌하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미적 행동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준다.
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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