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한국에 여행 나갔다가 기겁한 때가 있었다.
1994년 초여름이다. 서울시내 호텔에서 체크인을 할라치면 호텔 종업원이 “미국 시민권 갖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미 대사관에서 온 서류가 있습니다”하면서 봉투를 내놓았다.
뜯어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미군 항공기가 어디서 대기하고 있으며 미국시민의 제1 집결지는 어디고 제2 집결지는 어디라는 것을 명시한 후 “본인의 인적사항과 지금 머무르고 있는 호텔을 적어 주한 미 대사관에 빨리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이 IAEA(국제 원자력 기구)의 현장 검열을 둘러싸고 자꾸 말썽을 일으키자 영변의 북한 핵실험소를 폭격할 태세에 진입, 페리 미국방장관은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지금 어찌 되었는가. 북한은 핵실험에 성공했고 핵무기 운반체인 대륙간 탄도탄 발사 실험까지 하는 단계에 와있다. 6자 회담은 오히려 이들에게 시간만 벌어준 효과를 냈다. 앞으로 6자 회담이 계속될지 성공할지도 의문이다. “전쟁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할 각오” 운운은 종이호랑이 미국의 엄포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 미국은 북한을 테러국 명단에서 빼주는 호의까지 베풀었으니 당해도 보통 당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이제 물 건너 갔다.
몇 년 전 나는 관광목적으로 북한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때 우리를 따라 다니는 안내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우리보고 악의 축이라고 하는데 그런 모욕 참기 힘듭네다. 붙자면 한번 붙을 수도 있읍네다. 지금 미국과 맞서는 나라가 누가 있습네까. 러시아나 중국도 미국 눈치만 보지 대들지 못해요. 오직 우리 김정일 장군님만이 미국을 혼내주고 있습니다”
이 안내원은 자신들이 핵무기 가졌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치면서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계 어느 대통령이고 어디 나와 봐, 우리의 위대한 김정일 장군만한 인물이 있나” 이런 식이다.
북한은 끊임없는 긴장감 조성으로 뭉쳐져 있는 나라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면 미국과의 대립이 더 심해지고 그럴수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대한 장군님’ 이미지는 상승한다. 더구나 지금은 김 위원장이 건강문제로 한번 쓰러진데다 후계자 문제까지 얽혀 김 위원장의 이미지가 계속 위대해지지 않으면 체제가 흔들린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미사일발사를 ‘김정일 장군의 위대한 업적’으로 치켜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울 불바다’ 운운 하며 북한이 한반도 긴장감을 최고로 끌어올린 1994년은 김일성의 후계자 작업(김정일을 위한)이 이루어지던 중이었고 이어 미국 권유에 못이기는 척하고 김일성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받아 들였다. 그러다가 그해 7월 김일성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권력개편을 앞두고 급피치로 긴장감을 끌어 올린 후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과 거래를 하는 것이 북한 스타일이다. 3대에 걸친 세습제 정권을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한 북한식 후계자 정지작업이며 선군정치를 부르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 러시아, 중국과 맞먹는 핵보유국이 되면 남한의 경제협조는 불안감의 대가로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일석이조의 계산법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북한의 착각은 미국에게 보통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 북한문제의 해답은 1994년이 말해주고 있다. ‘김정일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북한은 한번더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소란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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