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느 대학의 국제 하기대학 한국문화 특강에서 한국의 대표적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이 거론되는 것을 들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 그런 스토리들이 실제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하다가 이중 특히 흥부 놀부 이야기가 은근히 한국인들 심리 깊숙이 자리 잡혀 있지 않나 하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가난하지만 맘씨 착한 흥부는 부상당한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이듬해 그 제비가 물어다준 박씨를 심어 주렁주렁 열린 박에서 온갖 금은보화가 나와 팔자를 고친다. 부자이지만 심보 고약하고 심술쟁이인 형 놀부는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치료를 해주고 같은 결과를 바라지만 결국 망하고 만다. 고로 우리는 흥부처럼 마음씨 곱게 살아야 한다고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상당수 한국인들은 자신을 흥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한국이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루는 가운데 권력의 힘을 빌고 편법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인들은 부자들을 은근히 불신하고 삐딱하게 본다. 가난함에는 착함을 연결시키고 부자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놀부 기질이 있다고 흔히 얘기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인들은 우리 자신들을 흥부로,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들을 놀부로 보며 못 마땅히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가난했던 우리는 흥부처럼 착하게 살며 열심히 일해 오늘날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우리 보다 앞서 있었던 소위 선진국들은 놀부 근성을 가지고 우리를 무시하고 심술을 부린다. 고로 그들의 앞날은 순탄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상당수 한국인들 마음속에 은근히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 우리보다 못 사는 동남아나 중국에서는 거들먹거리며 예의 없이 구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졸부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예전에 한강 남쪽에 논밭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그곳이 서울 강남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땅을 팔아 갑자기 부자가 되었지만 신분에 준하는 품위를 미처 갖추지 못했다 하여 그들에 졸부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는데 우리가 남의 눈에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경 올림픽에서 한국이 중국 관중들의 홀대를 받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몇 달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취임 후 처음 고국 방문길에 강조하고 다시 강조한 메시지는 한국이 경제 능력에 비해 국제적 기여도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현재 우리나라의 실제 모습은 흥부보다는 놀부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팔자를 고친 흥부는 마을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망해 버린 형 놀부를 도와주어 결국 모두 함께 잘 살아가는 것이 흥부전의 결론인데 우리는 그러한 나눔과 베풂의 메시지보다는 흥부와 놀부를 지극히 단순화시킨 선악 구도에만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베풀지 않는 흥부는 결국 흥부가 아닌 것인데.
오늘날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 위의 논리대로 라면 놀부 나라 1호인 미국의 대표적인 부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신들의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범인류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놀부국 국민이고 엄청난 부자라 분명 놀부여야 하는데 흥부처럼 착하게 살려하니 이들을 한국인의 선악구도에 꿰어 맞추기가 쉽지 않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의 셀프 이미지가 흥부라는 사실은 참으로 귀중한 것일 수도 있다. 아직도 자신들의 팔자가 달라진 것을 실감하지 못해서 흥부의 진수를 보이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현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관대하고 겸손한 흥부의 모습을 보여 주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기왕이면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졸부나 놀부 이미지로 너무 굳어지기 전에 그렇게 되기를 고대해 본다.
김유경
Whole Wide World Inc. 대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