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창문을 여니 희뿌연 안개 속에서 싸한 바람이 확 불어닥친다. 아랫마을도 온통 안개로 하얗게 덮여 있다. 세상이 꿈결같이 몽롱하고 희고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 곳엔 일상의 무게가 사라진 가볍고 깨끗한 선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마야의 베일 같은 안개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덧없이 사라지고 엄숙한 하루의 시작을 깨우친다.
어느새 또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손님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한 해의 마지막 달에는 개인 일이나 사무적 일이나 주위에 정리해야할 일들이 쌓여있다. 또한 새해를 맞기 전에 그 동안 소외되었던 마음의 빚도 정리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삶의 면면을 아우르는 진솔한 메시지가 담긴 카드를 찾는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 같다. 더 낳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고 직장을 옮기고 거처를 옮기는 그래서 인간관계도 실용주의, 개인주의로 바뀌게 되고 유전하면서 정작 마음은 더 소외되어 간다. 매일 시간에 쫓기는 척박한 현실에서, 각자 따로 뒹구는 낙엽처럼 서로가 고립되고 소통이 뜸해지면서 자기 홀로 외로운 실존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몸은 멀어졌지만 마음은 가까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카드에 더 의존하는 듯하다.
미국생활에서 식품 다음으로 생활화 되어있는 카드문화는 상업주의의 팽배로 보다 일찍 화려하게 자극적으로 선전해서 마치 많은 사람들을 시즌을 이용한 돈벌이 목표물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손님들이 10월초부터 크리스마스카드는 언제 내 놓느냐고 독촉한다. 그래서 할로윈과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크리스마스카드까지 전부 진열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계모나 시어머니에게 또는 전 남편에게 줄 카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또 목사님과 신부님 카드는?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X-마스 카드는? 고양이나 개에게 줄 카드는 어디에? 신문배달부와 우체부의 카드는? 종일 대답하고 찾아주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1월엔 정월 1일, 2월엔 발렌타인의 날, 3월엔 세인트 조셉과 세인트 페트릭의 날, 4월엔 부활절, 5월엔 어머니의 날 6월엔 아버지의 날과 졸업식들, 9월엔 조부모의 날과 10월엔 연인의 날과 할로윈, 11월엔 추수감사절 그리고 12월엔 크리스마스로 이어져 일년 열두 달 시즌을 따라 분주하게 보내게 된다.
이렇게 많은 시즌을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고,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끼리 만나거나 카드를 보내며 안부와 소식을 전한다. 특히 인생의 허무함이 가슴을 적시는 노년기에 들면, 이런 시즌을 통해서 서로 만나고 안부와 상황을 묻는 일은 외로움을 달래어 정신건강에도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도 기껏 백년, 3만6,000 일을 산다. 하지만 삶이 단순하지 않기에 그 중 근심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는 사람도 많다. 심리학자 토마스 카풀러의 걱정에 대한 인생처방을 보면 “사람들이 하는 걱정 중 92%는 아무 쓸모없는 걱정이다. 그 중 40%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고, 30%는 남들의 이목에 대한 조바심이며 또 다른 20%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이고, 나머지 2%는 혹시 어떤 질병에 걸리지 않나 하는 걱정이다. 그래서 사람이 진정 할 만 한 걱정은 8%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일년동안 불필요한 기우로 우리 생의 가장 귀중한 시간들을 많이 허비한 셈이다.
이제 바쁜 12월이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기 위해 분주한 일상에서 일탈해서 마음에 여유라는 주머니를 달고, 말없으나 더 많은 영감을 주는 자연을 찾으려 한다. 어느 산자락에서 새벽의 해 뜨는 장엄한 광경과 숲 속에서 겨울비를 맞는 나무들의 잔잔한 협주곡을 듣고 싶다. 허공에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는 가슴에도 절절이 부딪친다.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면 말 이상의 전율이 온다. 말은 인간만이 하는 것이 아님을 자연이 말해준다. 신탁에 묻듯 자연에 가면, 삶의 순리와 평안을 찾게 되는 처방을 받는다.
김인자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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