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느끼기에는 조금 이르다는 감이 있었지만 일단 떠나기로 작정하고 휴가를 내었다. 자동차로 세 시간쯤 달려서 하루 이틀 쉬었다가, 다음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한가한 여정을 짰다.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 하면서 수평선을 보고 싶었다. 아직도 언덕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늦여름 꽃의 마지막 모습도 보고 싶었다.
일년에 서너 번씩은 오고 가는 길이건만 나는 이 해안 길을 참 좋아한다. 수평선을 망연히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경험했던 그 경이로움이 되살아나서 가슴이 쏴아 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본 한국의 바다에는 저렇게 아득한 수평선은 없었다.
크고 작은 바위 섬 사이로 물의 끝이 보였을 뿐이었다. 소녀시절에는 바다를 보고 먼 나라 이방의 도시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했다. 더 자란 후에는 아예 저 바다를 건너야 되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때의 한국은 물질적 가난과, 사고의 협소함과, 닫힌 사회가 젊은 사람에게 강요하는 그 압박감 때문에,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떠나고 있었다. 그 때로 부터 수십년이 흘렀고, 이제는 이방이랄 수 없는 내 나라에서 내 길을 달리며, 나는 지금 저 수평선과 그 위에 떠 있는 오일펌프 스테이션을 바라보고 있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는 낮은 동산에는 기대했던 대로 검은 씨들을 매달은 채 들꽃이 시들어가고 있고, 잔디는 노란 색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잔디 위로는 검정 소와 얼룩소들이 아주 천천히 먹이를 뜯고 있다.
솔뱅에서 이틀을 묵었다. 원래는 일박 예정이었으나 하루를 더 있기로 작정한 이유는 호텔방에 있는 벽난로 때문이었다. 이 차밍한 덴마크풍의 소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 호텔방의 벽난로는 모양새로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불이 들어왔다.
날씨도 쌀쌀했지만 그 분위기가 하도 좋아서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다. 알리잘 강은 말라 있었지만 강 옆으로 잘 가꾸어 놓은 골프코스도 나 같은 사람이 헤매기에는 이상적이었다. 다시 두 시간 북상하여 파소 로블레스. 캘리포니아 와인의 주생산지인 이 곳을 가는 길은 참 아름답다.
물론 큰 길 가에 있는 몇몇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지나야 하지만 화가의 눈처럼 볼 것만 보면 된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포도 언덕. 포도 넝쿨이 기막히게 열을 지어 늘어선 동산의 연속. 이탈리아의 타스카니, 프랑스 남부지방의 포도주 생산지들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백개도 넘는 와이너리 중에서 두 서너 곳을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한 집 밖에 가지 못했다.
파이어스톤 와이너리의 매니저가 우리에게 특별히 친절했고, 이름이 다른 포도주를 다르게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바람에 그 집에서 피크닉하면서 놀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하루를 지냈지만 아주 좋은 기억을 갖고 왔다. 사람들이 순박해서인지, 와인을 많이 마셔서인지, 친절했고 자주 미소했다.
이번 외출의 마지막 스톱은 우리가 자주 찾는 라 푸리시마 미션이 있는 롬폭. 오월이면 매년 플라워 페스티벌이 열리는 꽃 많이 기르기로 유명한 소도시이다. 아직도 들판에는 색색가지의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팔리지 못한 것인지, 씨를 받기 위해서 일부러 두는 것인지, 어쨌든 보기에 좋았다.
우리가 지나다니는 길가에 잘 생긴 나무들이 늘어선 농장이 있는데 무엇을 기를까, 늘 궁금했다. 이번에는 아예 큰마음 먹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과수원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기로 했다.
아하, 호두나무들이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호도 두 개를 기념으로 주워왔다.바다에서 들어오는 안개와 그 안개에 묻혀오는 실비 때문에 날씨가 궂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깨끗한 하늘이었다. 다시 해안 길을 반대편으로 돌아오면서 바라보는 수평선에는 여전히 오일펌프 스테이션 몇 개가 그림처럼 떠 있었다.
송정원 /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