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텍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나 33명의 학생이 죽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을 때 기자가 우려한 것은 희생자 중에 한국인이 포함됐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왜냐하면 제퍼슨 대통령 생가를 취재하러 버지니아에 갔을 때 이 학교에 1,000여명의 한국 학생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텍은 명문 공대인데다 주립대학이기 때문에 학비를 고려해 한국인 학생들이 몰린다고 했다.
그런데 저녁뉴스 시간에 “범인은 동양인처럼 생겼다”는 이야기가 등장했다. 동양인? 설마 코리안은 아니겠지. 32명이나 사살하는 범행은 한국인 기질상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러면 아랍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불만을 품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인도네시아나 방글라데시의 회교도일지도 모르겠네 등등 기자 혼자 가정해 본 상상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LA시간) TV를 켜봤다.
이게 웬일인가. 버지니아텍 총장이 나와서 경위를 설명하더니 이어 웬델 프리첨이라는 캠퍼스 경찰관이 “범인은 23세의 조승희로 영어를 전공하는 사우스 코리아 출신의 학생”이라고 신원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번 사건은 미국 역사상 캠퍼스 살인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가와 무엇 때문에 학생들을 처형 형식으로 잔인하게 사살했느냐가 미 언론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런데 그 범인이 코리안이라는 것이다.
‘범인은 23세의 사우스 코리안 조승희’라는 단어가 CNN을 비롯한 몇몇 TV에서 계속 자막으로 흘렀다. 더구나 희생자 시신을 처리한 의사는 “범인은 희생자들에게 한 발을 쏜 것이 아니라 3발씩 쏘아 확인 사살했다는 점에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TV 뉴스에서 ‘잔인한 한국인’의 이미지가 시간마다 방영되는 것은 코리안의 입장에서는 쇼킹한 일이다. 미주 한인들은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하는 경관들의 모습이 TV에 끊임없이 등장한 것이 미국 경찰 이미지에 결정적인 마이너스가 된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후세인의 나쁜 이미지 때문에 미국에 살고 있는 이라크인들의 이미지도 얼마나 타격을 받았는지도 알고 있다.
이번 버지니아텍 사건이 가져올 코리안 이미지의 손상은 심각하다. 한국 정부는 범인 조승희가 어릴 적에 미국에 이민 갔다는 식으로 밝히면서 한국인이라기보다 미국에 거주하는 영주권자라는 것을 은근히 표시하고 있지만 미국 언론들은 사정없이 “사우스 코리안”이라고 못 박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코리안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더구나 범행동기가 치정관계라고는 하지만 조승희가 자살했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을 캐내려고 미국 매스컴의 보도경쟁이 앞으로 치열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잔인한 사우스 코리안의 이미지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단계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미국 언론이 ‘사우스 코리안’이라는 단어를 필요 이상으로 되풀이해 간접적으로 마이너리티 차별을 부채질하는 것이고 또 한국 정부와 한인사회 단체들이 미국민에 사과합네 하고 쓸데없이 뭘 발표하는 등 오버액션을 보이는 것이다. 입 꼭 다물고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clee@koreatimes.com
<이 철 /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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