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와중에도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봉사를 아끼지 않은 데이빗 댄범의 교회 건립 당시 모습(큰 사진). 일흔이 넘은 노병으로 변한 데이빗 댄범이 동두천감리교회로부터 받은 감사패를 들어보이고 있다(작은 사진). 〈오빌마이어스 몬테레이카운티헤럴드 제공〉
한국전 참전군인 댄범
동두천 교회 재건 열성
완공 못보고 미국 귀국
오늘 53년만에 한국행
한국 전쟁 때 불탄 동두천의 교회를 맨손으로 재건했던 푸른 눈의 파병군인이 50여년만에 한국을 방문한다. 주인공은 한국전 참전 군인인 노스 카운티의 데이빗 댄범(77)씨.
“이렇게 한국에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시 폐허나 다름없던 그 곳이 많이 변했다고 하더군요.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습니다”라며 댄범씨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하루 전인 9일 본보와 통화에서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댄범씨가 동두천 감리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953년. 당시 1169 공병대에 근무하던 댐범씨의 눈에 짚으로 엮인 허름한 곳에서 한국인들이 예배를 드리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댄범씨는 당시 종군 장교와 함께 교회를 방문한 후 “이 나라가 너무 처참하게 파괴됐구나”란 생각이 들었다며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교회를 재건하려는 댄범씨의 노력은 시작된다.
댄범씨는 함께 근무하던 군인들은 물론 주변의 8055 야전병원의 간호사, 가족과 친구들을 설득해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캘리포니아주 퍼시픽 가든의 본인 교회에 연락, 특별 헌금을 조달받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댄범씨는 그가 일군 교회 완공을 끝내 지켜보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한국전쟁이 종전되며 귀국 명령서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댄범씨는 그 후 고향인 노스 카운티로 돌아와 어업에 종사하며 한국과 인연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50여년을 보내야만 했다.
댄범씨는 “사는 동안 부인이 그 교회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마땅히 알 방법이 있어야죠”라며 교회가 궁금했던 굴뚝같던 마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댄범씨와 동두천 감리교회의 재회는 지난해. 댄범씨의 처제가 우연히 한국의 유명 목사인 김장환 목사의 현지 부흥회 소식을 전해 주면서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시작됐다.
댄범씨는 부흥회 장소를 찾아서 당시 사진 등을 보여주며 한국과 인연을 털어놓자 김 목사는 흔쾌히 댄범씨의 한국 방문을 돕겠다고 나섰다.
10일 오전 8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댄범씨는 “한국이 많이 변했다고 들었다”며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 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맙다”며 벅차오르는 감회를 감추지 못했다.
<이석호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