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혼혈인 미육군 앤소니 존슨(35) 소령이 27년 전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효섭 기자>
“약속대로 의사 됐는데…
한인혼혈 군의관
애타는 사모곡
“비록 만날 수 없었지만 엄마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27년전 여덟 살 된 흑인 혼혈 꼬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의 나라, 미국으로 오기 위해서였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 꼬마는 엄마와 약속 하나를 했다. ‘의사가 되어 다시 비행기를 타고 꼭 엄마를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버지니아에 있는 육군 포트 유스티스기지내 맥도널드 아미 헬스센터에서 정형외과 과장으로 있는 앤소니 존슨(35) 소령의 이야기다.
그는 1972년 수원에서 한인 어머니 김수미씨와 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약 8년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근무했으나 1980년 미국인 어머니와 결혼을 하며 존슨을 미국으로 입양했다.
수원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고 있던 당시 그의 이름은 앤소니 김이었지만, 태평양을 건너며 성은 존슨이 됐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텍사스 포트 브리스(Fort Bliss)는 낯설었다. 한국말밖에 못하는 존슨과 영어밖에 하지 못하는 아버지. 혼혈로 지내야 했던 한국 수원에서의 생활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 텍사스에서의 삶이 더 힘들었다.
책을 읽었다. 운동도 열심히 했다. 주말마다 도서관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2년여가 지나자 실력도 좋아졌고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됐다. 그 사이 한국의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태권-V를 보면서 늘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수원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던 앤소니 김이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어요. 나중에 엄마에게도 꼭 의사가 되어 비행기 타고 다시 엄마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존슨은 모범생이었다. 1990년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무난히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UCLA 메디칼 스쿨에도 합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이어졌지만 그의 마음엔 늘 어머니와의 약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1999년. 약속은 현실로 다가왔다. 판문점에서 군의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비행기를 타고 엄마의 나라로 간 것이다. 한국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곧바로 수원으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인생이 그렇잖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엄마에게도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가족이 생겼는지 알 수 없잖아요. 엄마가 보고 싶지만 내가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엄마 앞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은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인 그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바쁘게 살았다”며 “딱 하나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텍사스에 있을 때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한국말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언제인가는 엄마의 말인 한국어를 꼭 다시 배우고 싶다”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김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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