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TV가 부시 대통령이 암살범에게 피살되는 가상 드라마를 만들어 오는 9일 방영할 예정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것도 본인을 실물 그대로 등장시킨 데다 사설도 아닌 공영방송(채널4)이 만들었다니 말이다. TV 뉴스에서 잠깐 소개하는 것을 봤는데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부시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은 매우 쇼킹했다.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이 드라마는 9.11 5주년을 맞아 방영될 예정인데 제작자인 피터 달레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컴퓨터 작업을 통해 실물을 등장시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부시대통령에 대한 유럽인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하는 드라마다.
9.11 이후 분명해진 것은 미국이 친구들을 잃고 세계 곳곳에서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테러세력이 약화되기는커녕 그 조직이 더 강화되고 있으며 아랍권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가까운 나라들이 문제라는 점이다. 이라크나 이란인도 없고 아프가니스탄인도 없다.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사우디의 무슬림들이다.
런던 지하철 폭파 테러범들도 영국계 무슬림이었고 얼마 전 미국 여객기 납치계획으로 소동을 피운 범인들도 영국 시민이다. 9.11관계 범인 대부분이 사우디 국민이었고 현재 유일하게 재판 받고 있는 ‘무사위’도 프랑스계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미국은 후세인의 탄압정치에서 이라크인들을 해방시켜 주었는데도 이라크인들은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는 기색이다. 오히려 미국에 저항하고 있다. 이라크의 치안 불안은 극도에 달하고 있으며 하루에 100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죽어가고 있다. 결국 이라크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닌 시아파와 수니파의 민족상잔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오늘 현재 4만2,500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사망했다.
미국이 곳곳에서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라크 전쟁의 대의명분을 잃어 침략자처럼 이미지가 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테러전쟁’을 내세웠으나 이라크가 알 카에다와 아무 연관도 없자 ‘핵무기 제조 예방전쟁’이라고 부르다가 다시 핵무기 제조 정보가 잘못된 것임이 밝혀지자 지금은 무슨 전쟁인지 명분이 애매해져 버렸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왜 2,700명의 미국 젊은이가 목숨을 바쳐가며 이라크를 지켜야 하는가. 국민들의 이 물음에 부시는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부시는 며칠 전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이슬람 파시스트”라는 표현을 써 이 전쟁이 민주주의 대 파시스트의 대결이라는 이념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이라크 전쟁의 원래 목적이 아니다. 이슬람 세계에는 옛날부터 과격한 원리주의자들이 존재해 왔다.
이것을 바로 잡겠다고 미국이 덤벼들면 문명충돌로 번져 전쟁은 앞으로 몇 십년이 더 계속될지 모른다. 테러위협은 더 심해질 것이고 미국이 정당방위의 수단을 택하면 ‘강대국의 만행’으로 비쳐져 세계 무대에서 더욱 고립될 것이다.
‘9.11 이전의 미국’과 ‘9.11 이후의 미국’은 전혀 얼굴이 다르다. 국가안보와 적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인들이 시간의 흐름을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은 지금 호랑이 등에 탄 운명이다. 내리면 잡혀 먹히는 신세가 되고 그냥 등에 타고 있자니 호랑이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달려야 할 형편이다. ‘미국의 사양길’이 시작되던지 ‘더 강한 미국의 탄생’이 시작되던지 둘 중 하나다. 9.11은 미국 근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으로 등장하고 있다.
clee@koreatimes.com
이철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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