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신발을 벗고 허리띠를 풀라는 공항 시큐리티 요원들의 말이 매우 귀에 거슬렀다. 허리띠를 풀면 바지가 내려가는 데다 맨 양말만 신고 서 있으려니 꼭 팬터마임 하는 코미디언 같은 기분이고 사람이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9.11 사태 직후 서울서 온 여류 문인을 안내해 미국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공항에서 신발 벗고 허리띠 풀라고 하자 이 여성이 당황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지금은 공항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신발과 재킷을 벗고 허리띠를 푼다. 언젠가 스페인에 갔을 때 공항에서 그렇게 했더니 시큐리티 요원들이 웃으면서 신발 벗지 않아도 된다며 말린다. 뜨거운 철판 위에서 춤추던 곰은 철판 위에만 올라가면 춤추게 마련이다.
폭약이 담긴 술병을 기내 선반에 올려놓고 그 옆에 시한폭탄이 장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놓은 다음 범인들이 중간지점에서 내리는 수법이 87년 김현희의 KAL828 폭파사건이다. KAL828 사건은 범인들이 “너 죽고 나 살자”는 테두리 안에서 저지른 범행이었지만 요즘 이슬람 광신자들이 꾸미는 여객기 폭파계획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번 영국발 미국행 항공기 폭파미수 사건을 보면 범인들이 여객기와 함께 공중 분해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죽자”라는 개념이다.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여기고 달려드는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이번 사건 관련자들이 파키스탄계 영국인 무슬림이라는 사실이다. 파키스탄인들이 관계된 테러사건이 점점 늘고 있다. 9.11을 계획하고 뒤에서 지휘한 칼리드 모하멧도 파키스탄인이고 뉴욕 월드 트레이드센터 지하 주차장을 폭파시킨 람지 유세프도 파키스탄인이다. 아메리칸 에어라인 기내에서 신발폭탄 소동을 벌인 리차드 리드나 지난해의 지하철 폭파범들도 영국계 무슬림이다. 오사마 빈 라덴도 파키스탄에 숨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이 테러리스트의 온상으로 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문제는 심각하다. 왜냐하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샤라프 현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친미파인 그가 실각하고 이슬람 강경파가 집권하는 날엔 파키스탄의 핵 보유가 문제가 된다. 만약 알 카에다 세력이 핵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골치 중의 골치다. 더욱이 최근 미국과 인도가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해 인도와 적대관계에 있는 파키스탄은 굉장히 불쾌해 하고 있다.
알 카에다는 이슬람 수니파다. 시아파인 헤즈볼라가 레바논 사태에서 뉴스의 각광을 받자 이들은 알 카에다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여객기 납치폭파를 서둘렀다는 분석도 있다. 알 카에다와 헤즈볼라의 반미테러가 이슬람 세계 내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식으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문제다.
수니파와 시아파 광신자들의 경쟁이 “너 죽고 나 죽자”식의 테러를 부채질하고 있다. 더구나 이번 영국에서 검거된 범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평범한 무슬림들이고 주변에서 모범적이라는 말을 들어온 얌전한 젊은이들이다. 지난해 런던 지하철 사건의 범인들도 그랬었다. 이는 무슬림 청년층이 순교정신으로 테러행동대에 가담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상으로 무장된 세력이 너 죽고 나 죽자고 나온다는 것은 문명의 충돌 쪽으로 점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예측 불허와 불안이다.
clee@koreatimes.com
이철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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