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등록만 했어도 얼마나 좋겠어요”
한국축구대표팀이 토고를 꺾고 프랑스와 비기며 16강 진출의 꿈이 무럭무럭 커지던 때 한 시민단체의 관계자가 내뱉은 탄식이다.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 유권자등록 캠페인을 펼치는 이 관계자로서는 유권자 등록에 냉담한 한인들이 월드컵에서는 광적인 호응을 보인 것이 무척 아쉬웠던 것이다.
전국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월드컵에 들떴던 한국에서는 월드컵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놓고 지식인들의 갑론을박이 쏟아져 나온다. ‘민족주의에 들뜬 감정의 과잉’부터 ‘사회 변화를 이끌 역동적 에너지의 발견’‘대선에 미칠 영향’까지 다양하다. 스포츠가 단순한 눈요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LA한인사회는 월드컵이 훑고 지나 간 후 형성돼야 할 담론이 ‘출장 중’이다.
‘지단 박치기’의 뒷 이야기는 난무하지만 월드컵의 열기를 어떻게 한인들의 일상으로 승화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물론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이 아닌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인데 말이다. LA한인타운에서 펼쳐진 붉은 악마 응원은 자생력이 떨어지는 LA붉은 악마의 현주소를 낱낱이 보여줬다.
스위스전 거리응원 당시 한 곳에서는 주최측이 마련한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 응원가가 한국팀이 골을 먹을 때조차 터져 나와 자연스런 아쉬움과 슬픔을 덮는 인위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또 다른 곳에서는 거리응원을 앞두고 사회자가 “경품이 많이 준비돼 있으니 빨리 다른 이들에게 연락해서 거리응원을 나오게 하라”고 말하는 광경도 목격됐다. 부자연스런 응원은 바로 풀뿌리 자생력이 떨어지는 한인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셈이다.
한인 청소년들이 뿜어낸 열광적인 응원은 또한 소수계로 살아가는 한인 청소년들의 새장 속에 갇혀버린 끼를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주류 사회가 만들어 낸 ‘조용하고 말 잘 듣는’아시안 청소년의 외피를 한 꺼풀 베껴내면 한인 청소년들은 넘쳐나는 끼를 갖고 있음이 거리응원에서 확인됐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인 사회에서는 이들 청소년들의 끼를 담아낼 문화 공간 및 문화 행사가 부족한 형편이다.
월드컵을 통해 확인된 한인들의 결집된 힘을 한인사회의 숙원인 정치력 신장으로 어떻게 확대해야 할 지도 월드컵이 남긴 또 다른 과제다.
스위스전이 열린 23일 한인타운에는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장과 LA시의원 등 정치인들이 모여 월드컵을 지켜봤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한인들이 펼치는 응원에서 한인들의 역동성과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한인들의 결집된 힘을 칭찬했다. 그러나 매번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한인들의 낮은 유권자 등록과 투표율은 역설적이게도 ‘한인은 축구의 단맛에만 취한 소수계’로 비웃음만 사기 쉽다.
지단의 박치기와 함께 월드컵은 끝났다. 그러나 4년뒤인 2010년 월드컵때 단합과 결집을 자랑스러워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축제가 남긴 과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석호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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