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1960년 4월18일, 고려대 학생회 선언문).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1960년 4월19일, 서울대 학생회 선언문).
4월19일 화요일 아침, 대학 신입생이 되어 강의가 시작된 지 3주일째 되어 갔다. 동대문에서 청량리행 전차를 타고 가는 나의 마음에 분노의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의 조직적 부정행위, 마산에서 데모하다 죽은 김주열 고등학생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 그리고 바로 그 전날 깡패들에게 무참하게 두들겨 맞은 고려대 학생 데모대들… 이런 것들이 햇병아리 대학생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지펴 놓았다.
강의가 시작된 지 10여분이나 지났을까, 밖에서 무슨 함성이 들렸다. 공부하다 말고 내어다보니 상급생들이 현수막을 들고 어서 나오라는 것이었다.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몰려 나갔다. 청량리에서 동대문으로, 동대문에서 종로로, 종로에서 태평로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갔다. 갈수록 학생 데모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거리를 가득 메웠다. 까까머리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시민들이 몰려나와 박수를 쳤고 빵과 마실 물을 퍼다 주고… 이제는 학생들만의 데모가 아니었다.
우리는 국회의사당에 잠시 연좌데모를 하다가 기수를 중앙청으로 돌렸다. 중앙청 앞에서는 여론을 왜곡하던 서울신문 취재 차가 불타는 것도 보았다. 데모대는 점점 더 흥분했다. 경찰 바리케이드를 뚫고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를 향하여 돌격해 갔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 때 유행하던 군가가 데모대의 함성이 되었다. 경무대 출입구가 저만치 보일 때 그 곳을 둘러싼 경비대가 보였는데 그들은 먼저 공중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경고사격이었다.
“이승만은 하야하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그러자 갑자기 총소리가 콩 볶듯 들려 왔다. 누군가가 엎드리라고 소리 질렀지만 나는 오히려 그냥 서서 뛰어갔다. 경복궁 담벼락 후미진 곳까지.
한참만에 총소리가 끝나고 다시 데모 대열로 돌아오니 아수라장이었다. 피를 펑펑 쏟고 있는 학생, 엎드러져 죽은 학생, 악을 쓰는 학생, 보도 블럭을 깨서 미친 듯이 던지는 학생…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누군가가 하는 말을 되새기며 우리는 학교로 돌아왔다. 이미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몸조심하라며 타이르는 선배도 있었다.
데모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학교에 돌아오니 전국에서 140여명이 죽었고 우리 대학에서도 두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며칠뒤에 교수단의 데모가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으며, 부정선거의 원흉 이기붕의 일가족 4명이 자살을 했다. 4.19 학생혁명이 한반도 남쪽을 휩쓸고 지나갔고 그래서 한국 역사에 자유민주주의의 위대한 초석을 놓았다.
실로 젊은이들의 피로 산 자유, 목숨과 바꾼 자유민주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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