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 사는 고려인 노부부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이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느끼게 해준다.
광복 60주년 특집-잊혀진 고려인들
④ 다시 연해주로
독립국들, 자국민만 우대 - 고려인들 다시 난민 전락
1938년 11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농업부장 바꿀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타슈켄트주의 고려인 거주 집단 농장은 대단히 높은 영농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불모지에서 높은 수확을 거두었다”
고려인들은 밤낮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며 지난날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고 애쓰는 듯 했다. 맨 손에는 갈대 숲을 베고 운하도 파야했던 것은 물론, 늪도 말려야 했으며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짚, 모래, 갈대, 흙을 섞어 벽돌을 만들어 집도 지었다.
소련 연방 전지역에는 1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는데 고려인은 인구 규모에서 28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돈과 집, 자동차 등을 소유하며 연간 소득도 늘렸다. 70-80년대는 일반 노동자들의 10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고려인이 상당수였으며, 소련내 모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작가 아나톨리 김, 가수 율리 김, 빅토르 최, 성악가 넬리 리, 체조선수 넬리 김 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뛰어난 재능과 근면함으로 다른 민족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의 안정과 기반을 되찾은 후세들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제 2의 고향, 제 2의 조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이주 반세기만에 고려인들의 운명은 또다시 바뀌고야 만다.
1989년 민족간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소련이 무너지고 독립국가들이 생겨나면서 무시무시한 단어인 ‘난민’이라는 표현이 고려인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독립국가들은 러시아어를 배척하고 자국어를 공식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민족 차별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축들은 판매를 할 수 없었고, 공식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이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집단 농장장 등 사무직 또는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실직자들이 단기간에 공식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기에 단순노동자 또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나라는 협박 편지까지 받게 되었다. 공식 언어를 모르면 물건 하나 살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없는 암담한 현실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또다시 어디론가 자신들이 살 곳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었다. 조상들이 처음으로 한반도를 떠나 율도국을 찾아 떠났던 연해주, 바로 그 곳이 부모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조국 한반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연해주, 부모들의 고향인 연해주를 찾아 한 가정, 두 가정씩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모들이 강제이주 당했던 그 철로를 따라 역 이주를 한 것이다.
<새크라멘토 지국 - 김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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