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 역사 바로 잡기 운동이 한창인데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25 전사 재편찬이다. 왜냐하면 최근 미국의 한국전 관계 비밀문서가 하나하나씩 보안통제가 해제되기 시작하고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비사가 조금씩 중국에서 베일이 벗어지기 시작해 한국전쟁이 과연 어떤 전쟁이었는가의 그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가 ‘딘 소장 사건’이다.
미육군 제24사단장이었던 윌리엄 딘 소장은 개전 초기 인민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3년 후인 휴전협정 때 풀려났다. 그의 작전 실수 때문에 사단병력 1만6000명중 8,660명만 살아남아 24사단이 거의 붕괴되었으며 부대원 대부분이 장렬하게 전사한 ‘스미스 대대’도 딘 소장의 예하 부대였다. 그런데도 책임을 져야 할 그가 영웅으로 취급돼 최고 무공훈장인 ‘미의회 메달’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일계급 특진까지 했다. 딘 소장을 과연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딘 소장은 “25사단과 제1기갑사단이 부산에 도착할 예정인 7월20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대전에서 버티어 주어야 한다”는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명령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하루를 더 연장해 7월21일까지 버티다가 수많은 전사자 발생을 초래한 것이다. 하루 전에만 철수했어도 수천명의 꽃다운 생명들을 희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해서 대전을 방위한 데서 자초한 비극이었다.
딘 소장은 대전 시내에서 소대원들과 인민군 탱크에 직접 바주카포를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대항하다 길을 잃고 산 속을 36일간 헤매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사로잡혀 인민군에 넘겨졌다. 그러나 인민군측은 그가 포로가 된 것을 1년이 넘도록 발표하지 않아 미군에서는 그가 행방불명자로 분류되었으며 매스컴의 최대 미스터리였다.
딘 소장의 용전분투한 대전 전투 스토리가 신문에 보도되고 그가 미국민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1월 딘 소장 가족들을 백악관에 불러 위로하고 ‘미의회 메달’ 훈장을 수여했다. 트루먼으로서는 와해된 24사단 장병들의 사기를 위해서도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당사자인 딘 소장은 석방된 후 그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한국전의 영웅들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길을 잘못 들어 적에게 사로잡힌 부끄러운 지휘관입니다”를 되풀이하며 어색해 했다. 자신의 잘못된 작전으로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된 수많은 부하를 생각하면서 그는 평생 자신이 받은 훈장을 짐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의 생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딘 소장은 결코 영웅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양심 있는 군인이었다. 한국 전쟁의 미군 포로는 당시 매카시즘의 기승으로 대부분 고향에 돌아온 후 적군에 협조한 혐의로 냉대 받았다. 이들은 인민군에 고문당하고 조국에서 인정 못 받는 이중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막강한 독일군과 일본군을 패배시킨 미군이 한국 전쟁에서는 엄청난 사망자(3만4,000여명)와 7,140명이나 되는 포로를 낸 것은 뼈아픈 교훈이었다. 한국 전쟁이 여러 면에서 미국인들에게 잊고 싶은 전쟁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철 이 사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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