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부터 LA를 시작으로 이집트의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유물 전시회가 막을 올린다. 영국 사학자 카터의 투탕카멘 무덤 발견(1922년)은 20세기 고고학 발굴의 최대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1, 2차 세계대전, 볼셰비키 혁명에 맞먹는 세기의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3300년 전의 황금조각품과 보석 등이 파라오의 무덤에서 3만4,000점이나 쏟아져 나왔으니 세계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형보존을 위한 화학처리와 신중한 운반을 위해 무덤에서 카이로 박물관으로 모든 유물을 옮기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투탕카멘은 누구인가. 그는 왜 유명한가. 투탕카멘은 과연 참모들에게 암살 당했는가.
투탕카멘은 이집트 18왕조의 13대 파라오(BC 1350년께)로 9세에 즉위하여 18세에 갑자기 죽은 신비의 소년 왕이다. 그의 머리에 구멍이 난 것으로 미루어 뒤에서 자객이 둔기로 내려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돌았으나 지난달 미라 CT 촬영에서 그의 사망이 타살은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현재로는 그가 사냥하다 전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투탕카멘은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에 등장하는 람세스 2세보다 100년 전의 파라오며 따라서 모세보다 1세기 앞의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나타나기 900년 전이며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보다는 1,300년 전에, 그리고 예수 탄생 1,350년 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덤에서 나온 조각품과 세공품들은 현대 미술품에 뒤지지 않는 예술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집트가 고대 인류문화의 발상지라고 뽐낼 만도 하다. 그런데 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만 보물이 쏟아져 나왔을까.
소년 왕인 투탕카멘은 일찍 죽은 데다 자식도 없어 대가 끊어졌다. 더구나 재상인 ‘아이’가 새 파라오가 되자 투탕카멘의 아내였던 안케세나멘 왕비를 그대로 데리고 살았다. 따라서 후임자의 투탕카멘 이미지 흐리기 작업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의 무덤도 다른 왕과는 달리 외진 곳에 급조해 마련했으며 외부인들이 발견하기 힘들게 절벽 가운데를 팠다.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도굴범들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 무덤이 초라했기 때문에 후세 그가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아멘호텝이니 람세스니 하는 기라성 같은 파라오들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무덤을 어마어마하게 건축했다. 그래서 너무나 눈에 띄었고 결국 도굴범들의 타겟이 되어 수천년이 지나는 동안 미라 이외는 유물이 하나도 남아나지를 않았다. 쿠르나족으로 이루어진 어떤 마을은 수백년 동안 파라오의 무덤에서 파헤친 금을 팔아 전체 촌민이 편안히 먹고 살았다니 도굴이 새마을 사업(?)이 된 셈이다.
오늘날 이집트 파라오 중 가장 유명한 파라오는 기자 피라밋의 쿠푸나 태양교를 만든 아케나텐이 아니라 투탕카멘이다. 찬란한 유물을 남겼기 때문이다. 모든 파라오들이 영원히 기억되기 위해 피라밋까지 짓고 그 속에 보물을 감추었지만 바로 그 보물이 자신의 파괴를 초래했다.
통치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에 기억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나 당대의 권력만으로는 역사에 기억되지 못한다. 후세 사람들이 실감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 이것이 투탕카멘이 남긴 메시지다.
<이 사>
chullee@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