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와 케리의 대결 못지 않게 지난 몇달 동안 미국 매스컴이 시끌벅적하게 커버해 온 사건이 있다. 임신한 아내를 남편이 살해했다는 이른바 ‘스캇 피터슨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유명한 배우도 아니고 이름 있는 부자도 아니다. 시골의 평범한 중류층 백인 부부다. 그런데도 이 사건의 재판 진행에 미국민들의 눈이 온통 쏠려 라스베가스에서는 남편 피터슨이 무죄평결을 받느냐, 유죄평결을 받느냐를 둘러싸고 내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연속극을 좋아하지만 미국인들은 연속극적인 뉴스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 스캇 피터슨 사건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건현장과 재판결과 등 두 번의 보도로 끝났을 것이다.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죽였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이런 사건을 자꾸 보도하면 무엇보다 독자들로부터 “신문 지면을 채우기가 그렇게도 어려우냐” “그걸 뉴스라고 보도하느냐” 등의 항의가 빗발쳤을 것이다. 한국 뉴스는 그저 노무현이 어떻고 박근혜가 어떻고, 누가 요즘 실세고 누가 정치자금 받다가 체했는지에서 맴돌아야 인기가 있다.
피터슨 사건은 마침내 배심원의 유죄평결이 났지만 오는 22일 사형이냐 징역이냐를 결정하는 또 한차례의 배심원 평결이 남아 있어 뉴스 연속극의 제2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고 누구 하나 범행 현장을 목격한 증인도 없는 미스터리 투성이다. 기껏해야 침대에서 부인 레이시의 핏자국이 약간 발견되었을 뿐이다. 남편 스캇이 부인 레이시를 왜 죽였는지 동기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몰래 바람 피우고 있었다는 정도다.
시멘트를 범행 직전에 구입하는 등 그가 죽였다는 심증은 몇 가지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그런데도 배심원들이 유죄평결을 내린 것은 제2의 OJ 심슨사건을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심슨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고 배심원 제도에 구멍이 뚫려 교묘히 빠져나간 것이다. 미국민들의 심슨 재판에 대한 분노는 그후 무리해서라도 부부 살인사건에서는 유죄평결을 내려는 심슨 신드롬을 만들어낸 것 같다. 경찰이 제출한 범행과정은 피터슨이 아내에게 약을 먹여 잠들게 한 다음 목 졸라 죽인 후 사체를 시멘트 덩어리에 달아 바다에 버렸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TV 뉴스에 수십번 비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의 사진으로 판단하면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다. 동네에서도 모두가 부러워했었다. 가장 불행한 부부가 외관상으로는 가장 행복하게 비친 셈이다. 부부 관계는 겉으로만 보고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그 중에서도 부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살인자로 변할 수 있는 배우자를 왜 꿰뚫어보지 못할까. 외모나 매력, 재산에 너무 치우치다보면 상대방의 실체를 못 보게 되는 법이다. 흉악범으로 변할 정도의 배우자라면 교제할 때 어딘가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게 되어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결혼은 도박 중의 도박이다. 피터슨 부부의 결혼과정을 보면 그와 같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철 <주 필>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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