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경기가 종반전에 접어들었다. 보통 올림픽 주최국이면 10위 근처는 맴도는 법인데 그리스는 25일 현재 금메달 5개로 17위에 머물러 있다. 별로 메달 숫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 국민들의 만만디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들에게도 “정말 금메달을 가졌으면…” 하는 종목이 하나 있다. 무엇일까.
마라톤이다. 마라톤 경기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경기 자체가 BC 490년 마라톤 평야에서 펼쳐진 페르시아군과의 혈전에서 승리한 아테네 시민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종목이다. 마라톤전 승리는 그리스판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다. 그리스 국민은 역사에서 로마, 오토만 터키 등 외세의 지배를 2200년 동안이나 받아왔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둔 적이 거의 없었다. 마라톤전의 승리가 그리스 국민들의 자존심으로 표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처음 열렸을 때 마라톤 우승자는 아테네 교외에 살던 스피리돈 루이스라는 시골 물 배달원이었다. 그가 스테디엄에 선두로 들어오자 흥분한 그리스의 조지 왕이 일어나 모자를 벗어들고 흔들었으며, 왕세자가 로얄 박스에서 뛰쳐나와 루이스의 뒤를 쫓아가면서 응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피리돈 루이스는 지금도 그리스국민의 영웅이다.
시골에서 물 배달을 하던 루이스가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느냐는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 뛰는 마라톤 선수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당시 우승 예상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디 플랙이라는 선수였으며 그는 시종일관 루이스보다 엄청난 거리로 앞서 있었다. 그러다가 스테디엄 근처에 이르러 주저앉고 말았다.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그리스의 더위에 지쳐버린 것이다. 2위로 달리던 프랑스 선수도 기권해 버렸다. 이래서 평소 물 배달을 하며 뙤약볕에 익숙한 루이스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다. 집집마다 베란다가 있는 것도 저녁에 방안에 앉아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엊그제 거행된 여자 마라톤에서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폴라 래드클리프(영국)가 결승점 3마일을 남겨놓고 기권한 사실은 더위를 어떻게 컨트롤 하느냐와 남에 페이스에 어떻게 하면 안 말려드느냐에서 이번 마라톤 승부가 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죽하면 그 지독한 북한의 함봉실조차 20킬로 지점에서 기권했을까. 마라톤 선수가 중도에서 기권한다는 것은 수치에 가까운 일이다. 선수들이 이것만은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생명이 위험한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끝까지 뛴 한국 여자 선수들이 나중에 “죽을 뻔했다”고 말한 것은 이봉주 선수가 그냥 여성들의 엄살로 듣고 넘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영웅 황영조와 우연한 기회에 점심을 할 기회가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무더위 적응”이라고 한마디로 대답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무더위에서 살아 남아야겠다는 작전의 연장이 우승으로 연결되었다고 했다.
마라톤의 본 고장에서 열리는 이번 경기는 아테네 올림픽의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찌는 듯한 무더위 때문에 예상외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108년 전 그리스의 물 배달원에게 일어났던 기적처럼 말이다.
이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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