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로마에 단체관광을 갔을 때의 일이다.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한인이 경영하는 어느 선물가게 앞에 내려놓고 샤핑할 시간을 주었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옆에서 “아버님한테 꼭 어울리는 티셔츠가 있습니다”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자기 아버지한테 무엇을 선물하면 좋으냐고 물어본 모양이다 정도로 생각하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데 여자점원이 내 옆에 다가와 티셔츠를 들어 보이며 “아버님, 이 색깔 어떠세요?”라고 묻는다. 주위를 돌아봤더니 아무도 없다. 분명히 나한테 하는 말이다. 아버님이라… 아니 내가 며느리 둔 적도 없는데 이 여자가 날보고 왜 아버님이라고 거침없이 부르지? 나는 그때 속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아마 점원들이 손님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런 단어를 쓰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렇다해도 손님을 “파파”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런 말 쓰는 것 본적 없는데…
의문은 몇 달 후 서울 나갔을 때 완전히 풀렸다. 백화점에서 와이셔츠를 사는데 점원 아가씨가 “아버님한테 잘 어울리고” 운운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님“이다. 로마에서 한번 겪었는지라 이때는 충격이 덜했다. “아버님“의 진원지가 바로 서울이었구나.
그래서 점원 아가씨에게 물었다. 왜 남자 손님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느냐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50대 이상된 남자들은 그렇게 불러주어야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저씨”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나 “회장님“이라 부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서 온 사람은 듣기 거북하다고 했더니 “그건 미국식 생각이죠. 한국서는 남자들이 될 수 있으면 나이 먹은 것에 우월감을 느껴 어른대접 해주어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요즘 서울 나가보면 젊은 여성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결혼 10년이 지났는데도 서로 “자기야”하고 부르는 부부들이 많다. 오빠는 오빠다. 남편을 남매지간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질서파괴고 호적파괴다. “아버님“이라는 단어는 며느리나 사위가 쓰는 호칭이다. “어머님“도 마찬가지다. 자기 부모는 “아버지”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 나이든 남자손님에게는 “선생님께서”하면 되는 것이고, 50대 이상된 여성에게는 마땅한 호칭이 없으면 그냥 “손님께서”라고 부르면 된다.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면 반드시 행동도 막나가게 되어 있다. 50세가 넘은 남성이 부인에게 “야” “너“하는 것은 본인들끼리는 괜찮을지 몰라도 옆에서 보기에는 거북하다. 오래 전에 하와이대학에서 일본대학 여교수들과 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남편에게 가지는 불만이 어떤 것들인가”라고 기자가 물었더니 일본 남성들은 여자가 나이 먹었는데도 부인에게 “야” “너“ 소리를 함부로 하는가 하면 손찌검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문화가 남성 우위에 치중되어 있지만 이럴 때는 참으로 참기 힘들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예절은 질서다. 옛날 사람들이 법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절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좋으나 한국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는 저속한 유행은 아무리 서울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아버님“ “오빠”와 같은 용어를 거침없이 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모두 다같이 ‘쌍놈 되기 운동’에 참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부 한국 TV 연속극 때문에 잘못된 한국 풍속도가 해외동포 사회에까지 번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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