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내세운 명분은 세 가지였다. 첫째, 이라크가 세균전 무기를 대량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미국에는 탄저균이 소포에 담겨져 배달되던 때라 전국민이 공포에 싸여 있었으며 이라크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매스컴이 보도해 이라크 증오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파월 국무부장관이 유엔에서 미 첩보위성이 찍은 이라크 세균무기 생산공장 사진까지 제시하며 브리핑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두번째는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이다. 이는 부시가 연두교서에서도 강조했을 정도였다.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으니 믿을수밖에. 이라크가 핵무기를 만들어 알카에다 세력에 넘긴다면? 미국인들에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세번째는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를 돕고 있으며 이라크에서 알카에다 조직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9.11테러로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미국민들은 이 세 가지 명분을 받아들여 부시의 이라크침공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정당방위를 위한 예방전쟁으로 간주했으며, 의회는 부시에게 전쟁수행을 위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그런데 엊그제 발표된 상원정보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미국이 그릇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에서부터 국방부장관에 이르기까지 지도자 모두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이라크는 세균전 무기를 대량 생산할 생각도 없었고, 핵무기 개발도 추진하고 있지 않았으며, 알카에다와도 무관하다고 상원정보위 보고서는 밝히면서 만약 의회가 이같은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라크 전쟁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도대체 CIA는 무얼 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그런 엉터리 정보가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 있었을까. 이야기인즉 이렇게 전개된다.
몇년 전 이라크 정부의 엔지니어 한 명이 독일에 망명해 왔는데 그는 자신이 이라크의 세균무기 생산과정에 참여해 왔다고 했다. 독일 정보기관은 이 엔지니어를 미국 CIA에 소개했으며 그가 지적한 장소를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이 파월 국무부장관이 유엔에서 브리핑한 바로 그 사진이다. 그러나 알콜 중독자인 이 엔지니어의 진술은 대우를 받기 위한 창작소설(?)이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라크와 알카에다 관계도 체코의 제만 수상이 파월 장관에게 프라하에서 알카에다 멤버인 무하마드 아타와 이라크 정보장교가 만난 것 같다고 귀띔한 것이 럼스펠드의 기자회견 발표로까지 이어졌다. 체코 정부는 일이 커지자 “재조사해본 결과 확인이 안 된다”고 미국에 다시 통보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핵무기 제조 추진도 이라크 과학자의 친척에게서 들은 정보와 이라크가 로켓포 발사에 쓰려고 대량 수입한 알루미늄이 핵폭탄 제조에도 사용 가능하다는 CIA 판단관의 말만 믿고 부시가 연두교서에서 자신 있게 언급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기업체이건 국가이건 강경파들이 판을 치면 바른 말하는 사람은 말많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이같은 분위기에서는 언로가 막혀 보스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법이다. 결국 부시가 만들어 놓은 강경 일변도의 분위기에 참모들이 적응하다보니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부시의 자승자박이다.
이철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