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자주 하다보면 가끔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목격하게 된다.

지난해 관광회사를 따라 유타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70세 넘어 보이는 부부가 항상 팔을 다정스럽게 끼고 다녔다. 사실 나이 들어 남들 보는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다니는 부부는 용감한 사람들에 속한다. 이 노부부가 함께 버스에 탄 다른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당연하다. 미국 남성들도 끔찍이 여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70세 넘어 팔 끼고 다니는 부부는 드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정이 180도 달랐다. 6개월 전 남편 P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기억력을 상실해 부인이 팔을 끼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팔만 놓으면 P씨가 길을 잃고 헤맸기 때문이다. 아무리 효자라 해도 며칠만 간병하고 나면 진절머리를 내 자식이 부모 병간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고 한다. P씨는 부인도 몰라보고 자녀들의 이름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 상실이 악화되어 있었다.
더욱이 딱한 것은 여행중 밤만 되면 P씨 부인이 호텔 복도에서 서성거려야 했던 사실이다. 남편이 부인을 파출부로 착각해 “이제 집으로 가보라”면서 방에서 내쫓기 때문에 남편이 잠들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들어볼수록 기가 막힌 사연이었다. P씨는 과거 홍콩 무역관장까지 지낸 분이고 부인은 명문여고의 국어교사 출신이었다.
여행 3일째 우리 일행이 유타주의 모압(Moab)에 머무른 날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커피t샵에 갔을 때 P씨 부인이 매우 흥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빨리 와보라고 손짓했다. 남편 P씨가 간밤에 기억력을 회복했다며 한번 테스트 해보라는 것이다. P씨는 부인의 이름과 자신이 과거 무슨 일을 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자기들 부부가 관광여행중이며 라스베가스에 들르면 슬롯머신을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식당 이곳 저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어떤 분은 “할렐루야” 하며 감격해 했다. 관광 온 사람 모두가 “이건 기적이다”라며 흥분했다.
P씨가 의학적으로 어떻게 해서 기억력을 회복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집안에만 갇혀 있다가 밖에 나와 며칠간 웅장한 자연을 접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주변 환경을 바꾸어 보았다는 사실이다. 흘러간 명화 중에서 로널드 콜맨과 그레어 가슨이 주연한 ‘마음의 행로’라는 것이 있었는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편이 부인을 몰라보다가 어느 날 주변 환경이 바뀌자 기억을 되찾는다는 영화가 생각났다.
이민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환경변화는 휴식이며 여행도 그 중의 하나다. 7월의 독립기념을 시작으로 이 달부터 여행시즌의 막이 올랐다.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해방감이다. 잠시나마 자기 자신을 일상 일과에서 탈출시켜 새로운 충전을 하는 휴식이고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며 가슴 설레게 하는 젊어지는 시간이다. 사랑하면 젊어진다고 하지만 여행하면 젊어진다.
한인들은 대부분 비즈니스를 하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마치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그 사고방식의 탈피를 시도해 보는 의미에서도 휴가와 여행은 필요하다. 정말 비즈니스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없어도 영업에 지장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면 성장에 한계가 있는 비즈니스다. 그와 같은 테스트를 위해서라도 이 여름에 한번 여행을 떠나볼 일이다.

이철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