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딸이 12학년 때 파리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딸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프랑스어 반과 파리의 한 고등학교 영어 반이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몇 달에 걸친 모금행사와 준비 모임을 거쳐 드디어 여행을 떠나던 날 학생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대부분 첫 해외 여행인데다 그 동안 배운 프랑스어를 현지에서 써본다는 생각에 설렘 반 긴장 반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딸은 그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 12월 겨울비를 맞으며 며칠 강행군을 한 후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열 나고, 목 아프고, 온 몸이 쑤시고 … 객지에서 그것만도 고통스러운데 더 괴로운 것은 증상을 프랑스어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었다. 민박 중이던 파리 학생의 가족들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생각다 못해 마침 파리에서 파견 근무를 하던 친구에게 딸을 부탁했다. 그는 딸을 데려다 의사 진단을 받게 하고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여 주었던 모양이다. 딸이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콩나물국에 밥 말아먹었더니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그 아이가 평생 가장 맛있게 먹은 콩나물국이었다. 따뜻한 국물이 입안을 감도는 순간 집에 돌아온 듯한 안락함과 함께 아픈 것도 잊게 하는, 영혼을 다독여주는 음식, 콩나물국은 아이에게 소울 푸드였다.
텍사스 주의 한 교도소에서 조리사로 일했던 남성이 ‘죽으려고 먹는 음식’이란 책을 냈다. 무릇 음식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만 생애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이어서 그런 제목이 붙었다. 저자가 10여년간 복역하면서 사형수들에게 사형집행 전 마지막 식사를 조리해준 경험에 의하면 미국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어하는 음식 1위는 치즈버거와 프렌치 프라이이다.
만약 한인들에게 이 생의 마지막 음식을 고르라고 한다면 어떤 음식들이 꼽힐까. 김치와 밥, 구수한 된장국, 혹은 얼음 조각 떠있는 동치미 국물 … 의식의 가장 깊은 뿌리, 정신의 고향에 가서 닿는 그 어떤 음식들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오사카 인근 사카이에 세워진 한국인 전용 양로원 ‘고향의 집’을 방문했었다. 영화 ‘사랑의 묵시록’의 주인공으로 한국 전쟁고아의 대모로 불렸던 윤학자 원장의 아들, 윤기씨가 세운 시설이다.
조선 총독부 관리의 딸로 7살 때부터 한국에서 자란 일본인 윤학자씨(일본이름 다우치 치즈꼬)는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말을 사용하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복을 입었던 ‘한국인’이었다. 목포에서 공생원을 만들어 고아를 돌보던 남편 윤치호 전도사가 6.25때 행방불명되자 그는 직접 고아원을 운영하며 봉사, 1968년 그가 별세하자 목포시는 최초의 시민장을 거행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 했다.
그런 그가 생의 마지막 고비에서 의식이 희미해지자 일본말로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메보시가 먹고 싶구나”- 김치로는 채워지지 않던 깊은 갈증이 그의 영혼의 밑바닥에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생의 말년에 우메보시를 그리워한다면 일본의 한국 노인들은 얼마나 김치가 먹고 싶을까”- 윤기씨의 ‘고향의 집’ 아이디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카이에 이어 고베에 세워진 ‘고향의 집’에서 한국노인들은 한국말을 쓰고 김치를 먹으며 푸근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김치는 한국 노인들의 영혼을 다독여 주는 음식, 소울 푸드이다.
패스트푸드가 우리의 음식문화를 위협하고 있다. 집집마다 아이들은 빈대떡보다 피자, 나물보다는 샐러드, 밥보다 햄버거를 좋아하게 된지 오래이다. 가족 사이에 입맛의 단절현상이 있다. 음식문화는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가족의 동질성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2세, 3세가 한국말은 못하게 된다 해도 핏줄의 증거로 가장 오래 가지고 있을 것이 ‘입맛’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는 밥상의 힘은 생각 보다 깊고 크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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