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미주한인감리교회 선교100주년기념예배가 끝난 후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해 관계자들과 테이프 컷팅을 하고 있는 미연합감리회 펜실바니아 서부 관할주제 김해종(왼쪽부터 네 번째) 감독과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김진호(김해종 감독의 왼쪽) 감독.
<하와이=김명욱 기자>미주한인감리교회 선교100주년기념대회(대회장 김해종 감독)가 4월24일부터 27일까지 하와이 컨벤션센터와 미주최초의 한인교회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열렸다. 대회는 과거를 돌아보며(Remembering the Past), 현재를 축하하며(Celebrate the Present), 미래를 꿈꾼다(Envisioning the Future) 주제로 열렸다. 미주 최초의 한인교회 탄생과 이민사 그리고 대회 기간 중 가진 행사와 기념 주제강연 및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관의 축하 메시지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미주 최초의 한인교회는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이다. 1902년 12월22일 인천항을 떠난 게일릭호에는 하와이로 이민가는 한인 102명이 타고 있었다. 이 일행은 인천항을 떠날 때 121명이었으나 일본 고베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탈락된 자를 제외한 숫자이다. 이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13일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하와이 한인 이민은 1903년 7월4일 한인 기독교도들이 오하우 섬의 모쿨리아에 있는 농장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03년 11월3일 호놀룰루에 있었던 한인들이 인천 내리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받은 홍승하 전도사를 첫 담임교역자로 정하고 통역 안정수 권사와 우병길을 대표로 선정하여 감리교회의 하와이지방 감리사 피어슨과 교섭하여 한인감리교회 전도회를 조직하고 리버호텔 스트리트에 집을 얻어 예배처를 삼았다. 그리고 11월10일 첫 개척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의 창립예배였고 미주한인감리교회이자 미주 최초의 한인교회 창립이 되었다.<미주한인감리교회백년사 제1권 참조>
이미 지난 1월13일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하와이 주정부와 호놀룰루 시가 후원하여 한인 이민 100주년기념대회가 하와이 호놀룰루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이번에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념대회는 미주 최초의 한인교회 탄생과 미주 최초의 한인연합감리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리기 위한 대회로 미주한인감리교회 이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회장 김해종 감독)가 추최하고 미연합감리교회 선교국과 한국의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협조아래 진행된 것이다.
기념대회는 4월24일부터 27일 오전까지 하와이컨벤션센터에서 열렸고 27일 오후 2시 1,500여명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마지막 대회로 열렸다. 24일 오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개회예배는 대회장에 마련된 1,200석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고 성가대와 찬양팀과 스탭진 등을 더하면 약 1,400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3일 동안 계속해 예배를 가졌고 마지막 날은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가밀교회에서 100주년기념예배를 가졌다. 24일 개회예배는 이처권(대회 준비위원장) 목사의 사회, 찬양, 100년을 생각하는 비디오상영, 인천내리교회의 이민선교의 불 점화, 김상모(뉴욕만백성교회) 목사의 개회선언, 훌라 찬양팀의 찬양, 메리 앤 스완슨 감독의 환영사, 하와이연합성가대의 축하찬양, 김해종 감독의 ‘이민교회 뿌리와 날개’란 제목의 설교, 이동진 목사의 축도 등으로 진행됐다. 25일 저녁예배는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관이 이민선교이야기란 주제로 축하 강연을 했다. 이어 인천에서 온 내리교회성가대의 특별찬양이 있었고 김진호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이 ‘일어나 빛을 발
하라’란 제목의 설교, 미주내 감리교 30년 이민 목회자들에 대한 표창, 차현회 목사의 축사, 조성원 감독의 축도 등으로 이어졌다.
26일 저녁예배는 조영철(한사랑교회) 목사의 사회로 한국과 L.A, 뉴욕과 하와이 현지의 이화여고동문합창단의 ‘천지창조’ ‘할렐루야’ 찬양, 전양
철 감독의 축사, 강영숙 목사의 ‘화해와 평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란 제목의 설교, 쥬디 정 목사의 축도 등으로 계속됐다. 27일 오후 2시 하와이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이은철 목사)에서 열린 이민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는 김웅민 목사의 사회, 이은철 목사의 환영사, 연합성가대의 찬양, 이덕균(뉴저지 갈보리교회) 목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란 제
목의 설교, 김호영 목사의 헌금기도, 성찬예식, 박대희 목사의 축도 등으로 진행됐고 이어서 100주년기념비 제막식과 타임캡슐 행사 등으로 대회는 모두 끝났다.
기념대회는 축하예배 뿐만 아니라 대회가 진행되는 낮시간에는 100주년을 기념하는 주제강연과 각종 워크샵으로 이어졌다. 25일 김찬희(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 박사는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란 주제의 강연을 통해 "미주한인교회는 조국이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됨에 따라 대외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잃지 않고 전도 사역과 봉사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교회의 대외 활동은 1945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렇듯 한인교회는 지난 100년 동안 미주 한인사회에서 중추적 역할
을 담당해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담당해 오고 있다"며 "앞으로 교회가 가져야 할 선교적 비젼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체임을 늘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또 교회는 코리안-아메리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전승하여 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대외선교를 통해 한국의 평화와 미국에 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조국은 분단된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전쟁의 공포와 위험 속에서 해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미주의 한인교회는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며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 정성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요 선지자적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26일 김득중(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박사는 ‘한인감리교회 이민선교 100년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란 주제의 강연을 통해 "하와이에 세워진 한인교회들은 선교는 물론 한인들의 사회운동 및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06년 호놀룰루한인교회에서는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하고 2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부터는 교회기관지인 <하와이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여 교포들 사이의 소식을 전하는 언론매체가 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김 박사는 이어 "이민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의 한인들은 이제 더 이상 미국 안에서 ‘카멜레온’처럼 미국인들의 눈치나 보며 주변색깔에 적응해 살려고 하는 주변적이며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미주 지역의 한인교회들은 더 이상 도움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교회가 되었다"며 "한인들과 한인 교회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흑백 갈드으이 조정자가 되고 다수자와 소수자,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화해자가 되어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로서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관은 25일 저녁예배에서 ‘이민선교 이야기’란 주제의 강연을 통해 "나의 조부모님들의 하와이 이민 이야기는 그 당시 첫 하와이 이민자들의 경험들과 매우 유사하다"며 "그 분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과 편견에 부딪치며 일해야 했고, 주류사회에 참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헌신과 그들에게 보다 낳은 삶의 기회를 주기위한 노력을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하루에 69센트를 버는 사탕수수 농장에서부터 자영업을 얻기까지, 양복점을 하신 나의 문 조부님과 당구장과 이발관을 하신 이 조부님, 그분들은 가까스로 생활을 영위해 가면서도 자녀들이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마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고 회상했다.
문 대법관은 이어 "나의 아버지는 장남이고 돈이 없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어 고등학교를 마치고 타임키퍼로 파이네플 농장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조부의 양복점을 이어 받았다. 나의 어머니는 상업학교를 졸업했고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아버지는 오랜 세월동안 교회학교 선생, 크리스챤 후원그룹의 자문위원, 성가대 지휘자로 섬겼고 어머니 역시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며 예배 때 피아노를 쳤다. 우리 형제들에게는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었다. 교회참여는 꼭 해야했고, 주일예배를 빠지게 되면 어떤 이유고 용납이 되지 않았다"라며 "아버지는 내가 1982년 판사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내가 판사가 된 이유 중에 하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사회봉사의 중요성에 대해 본보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정신과 오랜 세월동안 가르쳐 준 삶의 가치들은 등대가 되어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문 대법관은 "이민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날에 나는 여러분과 함께 개척자적 정신과 용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보다 낳은 삶을 위해 헌신하신 조상님들을 기리고 감사한다. 그분들께서 남긴 일과 삶의 윤리와 가치들을 지켜갈 것을 우리 함께 약속하자. 그리고 계속적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해가면서, 동시에 한인사회와 인류공동체의 하나님을 위해 조화롭게 살고 일해가자"고 덧붙였다.
<김명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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