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군번없이 사선누비다 ‘징용해제’
9년뒤 강제입영중 늑막염으로 의병제대
남들은 한 번도 하기 싫어하는 군복무를 두 번이나 했던 기막힌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황천성(64·팜데일)씨. 그는 얼마전 한국정부를 상대로 4억5,000만원의 손배소송을 서울지법에 제출했다. 거액을 손에 쥐어 보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지난 삶을 정리하다 보니 두 번의 군생활이 자신의 꿈과 목표를 너무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렸다는 큰 아쉬움과 병역문제가 한국정치권에서 이슈화 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50년 가까이 가슴에 묻어둬야 했던 사연은 1951년 2월, 당시 13세였던 황씨가 강원도 철원 외딴 곳에 있던 자신의 집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인근 마을에 갔다가 국군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곧바로 현지입대해 군번도 없이 전쟁터를 누비며 연락병, 적진탐색, 소총수 등으로 활동하던 황씨는 이듬해 2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발등에 총상을 입고 계곡으로 추락, 턱과 갈비뼈에 심한 손상을 입고 후송됐지만 심한 늑막염으로 ‘징용해제통지서’란 종이 한 장만을 받고 첫 군생활을 마쳤다.
이후 의대진학을 꿈꾸며 장충고등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던 황씨는 난데없이 날아 온 징병검사 통지서를 받게 된다.
정부기관을 찾아 다니며 부당성을 설명했지만 모두 거부됐고 결국 1959년 논산훈련소에 다시 입대, 두 번째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중 입은 늑막염이 다시 악화돼 의병제대를 하게 됐고 3년 가까이 치료를 받으면서 집안사정도 어려워져 오랫동안 소망해 온 의대진학의 꿈을 접은채 한국전력을 시작으로 직장생활에 매달리다 1980년 이민이란 길을 선택하게 됐다.
이후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앞만보고 달렸던 황씨는 2001년 한국정부가 한국전 참전용사 등록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LA총영사관을 통해 신청했지만 국방부 기록에 없어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답변만이 계속되자 한국으로 달려가 빛바랜 ‘6.25종군 기장증’과 ‘해제증명서’를 보여주며 이의를 제기, 지난 6월 마침내 참전용사로 인정받게 됐다.
팜데일에 1에이커 규모의 작은 농장을 구입해 야채와 화초를 가꾸며 가끔 아들들에게 물려준 자동차 정비업소에 들리곤 한다는 황씨는 “지나간 세월이 뭐 그린 대단하겠냐”며 “사회비리 척결에 일조하는데 족할 것이며 법원의 판정을 지켜볼 뿐”이라고 말했다.
<황성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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