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는 일이 생기면 군자는 스스로 낯가죽이 두껍지 못한 탓이라고 반성한다. 그러나 자신의 낯가죽이 두껍다고 여기는데도 이처럼 실패하는 일이 생긴다면 군자는 스스로 자신의 속마음이 시커멓지 못한 탓이라고 반성한다.”
‘후흑열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낯가죽이 두껍고 뻔뻔할수록, 거기다가 뱃속이 숯덩이처럼 시컴해 음흉할수록 성공한다는 이야기로 이름하여 ‘후흑열전’이다.
청나라 말기 사람 이종오(李宗吾)가 그 저자다. 그는 중국의 신해혁명 무렵 이 후흑(厚黑)의 역설을 통해 썩어빠진 당시 사회상을 고발해 민중에게 웃음을 선사했다고 한다.
영웅호걸치고 후흑의 묘를 따르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으로 염치 따위와는 담을 쌓은 두꺼운 얼굴과 세상을 속이는 시커먼 배짱을 지녀야만 출세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흑학을 3단계로 나눈다.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뱃속이 시커먼 정도는 초보다. 2단계에서는 낯가죽이 두텁되 단단하고, 뱃속이 꺼멓되 밝게 비쳐야 한다. 최고의 경지는 낯가죽이 두껍지만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커멓지만 색체가 없어야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완전히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 후흑학을 수련하는 자로서 모름지기 지켜야할 여섯가지 사항이란 것도 있다. 그 중 하나가 흉(兇)이다. ‘내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알바 아니다’는 자세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는 정도의 흉악함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그 흉악함의 위에는 반드시 인의도덕의 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그럴듯한 명분으로 내 속의 흉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후흑의 도’(道)란 것은 80년전에 나온 이야기다. 위선적인 유교의 예교로 그럴듯 치장은 했지만 썩을대로 썩은 당시 중국의 관료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후흑학 소개가 장황해졌다. 말이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뭐랄까. 후생가외(後生可畏)랄까. 아마 이종오가 오늘날 생존해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그런 외경의 염이 들어설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종오는 이렇게 경고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안에 도사리고 있는 흉(兇)을 인의도덕의 탈로 가려라.”
명분 같은 건 잊은지 오래다. 아예 가면을 벗고 악을 쓰자. 그것도 큰 소리로 다 함께. 그게 2002년, 그러니까 새 천년 벽두의 한국 정치판이다.
왜 그들은 떼거리로 탈당을 해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는가. 이종오의 그 심원한 ‘후흑학’도 일찍이 내다보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니 참으로 대단한 한국정치라 할 수밖에.
<옥세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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