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귀덕리 425번지.
이것이 내가 태어난 고향의 주소다.
"충청도"하면 말도 느리고 행동거지도 굼뜨다고들 한다. 거의 30여 년을 같이 살아온 ‘집사람’한테서 까지도 ‘우유부단’하고 ‘답답하다’는 소릴 가끔 들으니 충청도가 느리긴 느린가 보다란 생각을 새삼스럽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결정하는 것이 느리고 행동이 느리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고 옳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논리를 펴다보면 느리지만 여유 있는 고향의 향수 같은 것을 발견하곤 한다.
고향사람들까지 만나면 느릿하고 정감이 가는 사투리로 이른바 ‘충청도식 축지법’이란 것을 얘기하며 박장대소하는 경우가 많다.
’느리고 굼뜨지만 머리회전은 빠르구먼유’
첫 째는 빠른 행동보다는 멈춰 서서 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야할 길인지 가서는 안될 길인지 살피기도 전에 길을 잡아 나가선 낭패를 본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일생을 한눈팔지 않고 한 길에 전념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 뜻이 바르지 않고 빗나간 것이라면 진실 된 길은 아니잖는가? 진실이 아니라면 처음에 빗나갈 때는 사소한 차이가 되겠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아주 크게 빗나감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통 삶의 지나온 과정을 보자.
大學전공의 선택에서부터 직장 결정, 배우자와의 만남……, 셀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일들을 선택하고 결정해 왔다. 뒤돌아보면서 앞으로만 밀고 나갔던 일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었는지 따져 볼 만 하지 않은가?
충청도식 축지법의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은 이러하다.
자갈밭을 딛지 말고 진창을 건너뛰지 말라.
알다시피 자갈밭은 둥근 돌들이 깔려있는 곳이다. 그러니 발을 내딛는 순간 돌이 구르며 미끄러지기 쉽고 울퉁불퉁해 발을 상하기도 쉽다. 단단하다고 해서 어느 곳이든 좋게 쓰이지 만은 않음이다. 그런 자갈밭이 앞에 놓이거든 흙이 다져진 길을 찾아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 얘기는 우리가 사회에서 몸담고 있을 곳을 찾는데도 도움이 될 듯 싶다. 모인 사람들이 서로 자기를 앞세우고 제각각 구르는 곳은 머물지 않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한편 진창을 건너뛰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할 뿐 아니라 자만심에 빠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진창이고, 또 그 진창너머엔 무엇이 놓여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몸을 훌쩍 날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흔히 무슨 남자가 그리도 소심하고 째째해서야 쓰겠냐며 몸을 띄워 날리면서 용감한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꽤나 보아온 터다.
요즘 벤처 사업 지원금 팍팍 뿌리고 그것을 넙죽넙죽 집어 삼켰다가 가족과 친인척, 친구들까지 망하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부류 아닐까? 주식투자로 크게 한 건 잡는다고 몸을 풀쩍 날렸다가 망하는 소시민들도 우리 주위엔 한없이 많다.
가지 않을 길이라면 마르길 기다리던지 아니면 디딜 곳을 마련하던지 그도 아니면 돌아가든지 해야지 용감한 척 건너뛰다간 큰 코 다친다.
어디 그뿐이랴!
충청도식 축지법은 점입가경이다.
걷다가 산이 나오면 하루 묵었다가 넘고, 강이 나오면 건너가 묵으란다. 빨리 갈 욕심에 험한 길을 무리하는 것은 피해야한다. 남보다 먼저 가려고 어두운 산길을 혼자 넘으려해서도 안 된다.
푹 자고 다음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르라는 말씀이다. 더디 가도 그렇게 함께 가는 것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도리란다.
강을 만났을 때는 그 반대다.
하루 묵었다 가자고 누가 붙잡더라도 뿌리치고 일단 강을 건느란다. 왜냐면 밤사이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날 수도 있는데 흥청이며 하루 밤을 소비할 순 없지 않는가? 자칫 하루 게으름이 며칠간 나그네의 발을 묶을 수도 있는 법이다.
즉 욕심을 버리고 유혹을 떨쳐야 하는데 우린 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이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하루, 하루를 가다보면 어느 누구보다 앞서 갈 수 있는 것이 충청도식 축지법이다.
필자는 작년에 "기자불립 과자불행"이라는 노자의 말을 인용한 컬럼을 이 난에 소개한 적이 있다.
발뒤꿈치를 들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기자불립)
가랑이를 한껏 벌려서는 오래 걷지 못한다(과자불행)
가랑이를 한껏 벌려 걸으면 얼마동안은 틀림없이 남보다 앞선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걷지 못할 것은 뻔하다. 또 남보다 더 높아지겠다고 까치발을 해봤자 그 것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걸음은 보폭이 작고 단단해야 오래 지탱하고 오래 걸을 수 있다.
겉보기엔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조급함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천천히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이 결국에는 빨리 갈 수 있는 나름대로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올해는 분수를 아는 걸음걸이로 조급하지 않게 걸어나가 보련다. 층청도식 축지법으로….
<본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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