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미대사관 영사로 있다가 한국 민주화 운동에 헌신

고 이근팔 선생(작은 사진)을 기억하는 지인들이 1일, 추모모임을 가졌다. 고인의 장녀 이승자·차녀 이승희(앞줄 왼쪽 세 번째·네 번째)씨도 참석했다.
워싱턴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이근팔 선생의 타계 1주기를 맞아 1일 조촐한 추모모임이 열렸다.
고인을 기억하는 지인들은 이날 낮 애난데일의 설악가든에 모여 당시의 활동을 회상하며 고인에 대한 그리움, 추억을 소개했다.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신대식 목사는 “우리의 형제, 동지, 아버지인 그가 세상을 떠났다”며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수고와 눈물, 고생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 이근팔 선생의 관계는 중국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관계와 비슷하다”며 “정직하고 강직하고 또한 명석했던 그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도 “정직하고 강직했던 그는 너무 고지식해 가족들이 고생하기도 했겠지만 민주화를 향한 그의 한결같은 헌신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열정이었다”고 회상했다.
고 이근팔 선생은 1924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진학해 법대 수석으로 졸업했다. 1968년 주미 한국대사관에 영사로 부임한 그는 1972년 워싱턴으로 망명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게 되면서 전혀 다른 길로 향하게 됐다.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 활동을 비롯해 한국의 민주화를 외치며 다시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입국금지를 당하게 됐다.
한국의 외교관에서 돌연 망명자 신세가 된 이근팔 선생은 5명의 자녀를 키우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필하는 그의 헌신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됐고 당시 정부 요직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그는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말한 후 워싱턴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고인은 지난해 2월 1일 버지니아 레스턴에서 98년의 생을 마감했다. 이날 모임은 김치환 장로의 주선으로 신대식, 정기용, 고대현, 노병원, 김환희, 홍일송 씨 등이 참석했으며 유가족을 대표해 장녀 이승자, 차녀 이승희 씨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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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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