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개 계승 ‘산홍’, 협박에 맞서…지역 사학자 “기생 아니라 항일투사”
구한말 을사오적을 꾸짖고 자결했던 경남 진주 기생(妓生) 산홍(山紅)이 항일정신을 인정받아 정부포상을 받을 수 있을까.
진주문화원 추경화 향토사연구실장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의기(義妓) 논개(論介) 정신을 이은 산홍의 명예회복과 정부포상을 추진 중이라고 4일 밝혔다.
산홍은 진주교방에 속했던 기녀로 논개의 절의를 계승한다는 자존심이 충만했다고 한다.
1863년생으로 추정되고 뛰어난 외모와 예능도 갖췄던 것으로 전해 온다.
산홍에 관한 기록은 항일순국지사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있다.
1906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진주에 왔다.
산홍을 보는 순간 이지용은 마음을 빼앗겼고 많은 돈을 내놓으며 자신의 첩이 돼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산홍은 "세상에서 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사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거절했다.
이지용은 크게 화를 내며 산홍에게 몽둥이질을 했다고 전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11월 22일 2면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기개 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고 실었다.
이지용이 산홍을 총애한다는 설은 각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는 등 널리 알려졌다.
1908년 2월 산홍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한 이지용은 지인의 생일잔치 등에서 산홍에게 보석과 반지, 거금을 주겠다며 첩이 돼 달라고 끈질기게 협박했다.
유학자 양회갑(梁會甲) 시문집 정재집(正齋集)에 '산홍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적혀 있다.
진주성 내 논개의 공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에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란 제목으로 산홍이 쓴 시가 걸려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논개는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안고 남강에 몸을 날려 이름을 남겼지만, 자신은 일없이 노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의기사 아래 남강 절벽 바위에는 '山紅'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충정에 감복한 사람이 새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보훈처는 자결 순국자 38명을 정부포상 한 바 있다.
만약 정부포상이 성사되면 산홍이 39번째 순국항일투사로 기록된다.
추 실장은 "통영 기생 이국희, 정막래 등이 3·1운동으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일이 있어 산홍도 충분한 자격이 된다"며 "산홍이 기생이기 때문에 후손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 제가 정부포상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매국노이자 당시 최대 권력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지조를 지킨 산홍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요 순국항일지사"라며 "자손들에게 훈육자료로 삼기 위해 정부포상을 신청하기로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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