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1920년 초에 있었던 일본인과 필립핀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의 결과로 농장 임금이 올랐다. 1922년 초에 길찬록이 이 기회에 돈을 많이 주는 오아후 섬으로 갔다. 천연희는 농장 가게에 빚진 돈이 많아 같이 갈 수 없었다. 천연희는 길찬록에게 노동환경이 좋다는 와이알루아 (Waialua) 농장으로 가라고 했으나, 그는 ‘술친구와 부동(符同)하여’ (끼리가 되어) 와이파후 농장으로 가서 개울 파는 일(ditch digging)을 했다. 하루에 3달러를 받아 방 값내고 나머지 돈으로는 술을 마시느라 마우이 식구에게는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았다. 천연희는 그 동안 빚진 돈을 다 갚고 아이들을 데리고 1922년 말에 오아후 섬으로 갔다. 남편이 있는 와이파후로 가지 않고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군인들을 상대로 세탁소와 양복점을 운영하는 와히아와(Wahiawa)로 갔다. 오전에는 세탁소/양복점에서 일을 하고, 오후에는 한인기독교회 소속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한글을 가르치는 댓가로 교회 뒷마당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4 식구가 살 수 있었다. 처음 몇 달을 그렇게 살다가 다른 곳으로 방을 얻어 이사하였다. 길찬록이와는 별거였는데, 그가 가끔 와히아와 천연희 집에 와서 며칠씩 있다가 갔다. 와서도 술만 먹었고, 천연희가 일을 가면서 아이들을 보라고 당부하고 가면, 어디서 또 술을 얻어 마시고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도 챙겨주지 않았다. 하루는 일을 갔다 오니 쌀과 간장이 있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은 즉 술을 같이 마신 박대성 (당시 29세)이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위해 주었다고 했다. 그 때부터 박대성이가 천연희 집을 드나들었다. 박대성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역적으로 몰려 도망 다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집 사랑방에 드나들던 홍 영감 편에 박대성이를 하와이로 보냈다. 박대성이가 12살에 하와이에 왔는데, 밀양 박 씨라는 것 이외에는 아버지의 이름 등을 전혀 몰랐다. 콩 장사를 하던 홍 영감은 얼마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박대성이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았다. 어찌어찌하여 박대성이는 백인 군인 집에서 살게 되었고, 백인 부인에게서 음식 만드는 것을 배웠다. 서양 음식을 잘 만들었기 때문에 그 집을 나온 후 쿡(cook)으로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천연희가 폐염으로 인사불성으로 누워있을 때 길찬록은 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밥도 못 먹고 있었다. 그 때 집에 찾아왔던 박대성이가 의사를 불러 오는 등 천연희를 잘 도와주었다. 그 후부터 박대성이는 천연희에게 길찬록과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졸랐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一夫從事 二夫不當” 이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중에 박대성의 아들 해리(Harry)를 낳았다. 그런데, 길찬록이 아들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와서 곧 위생국 (보건국)에 자기 아들로 출생신고를 해버렸다. 해리는 길찬록과 상관없는 아이라고 이야기를 했어도, 이혼을 안했으니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더 할 말이 없었다.
박대성이는 계속하여 천연희를 잘 돌보아 주었고, 또 길찬록의 아이들도 잘 키우고 공부시켜 주겠다면서 결혼하자고 졸랐다. 천연희는 길찬록과 살면 아이들 교육조차도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결국 아이들을 자유롭게 공부시킬 목적으로 박대성과 결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드디어 1924년 3월 18일에 길찬록과 이혼하였다. 후에 박대성이는 ‘남의 여자를 꼬신 나쁜 놈’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길찬록이는 자기가 “술쟁이”로 일을 하지 못해 이혼을 당하면서 정신이 나는지 순애와 은주(데이비드)는 자기에게 달라고 좋은 말로 부탁하였다. 천연희는 7대 독자 길찬록이 평안도 안주에서 결혼하여 딸만 5명을 낳은 것을 알고 있었고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데이비드가 길찬록의 유일한 아들이었음으로 그러마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천연희는 길찬록이 아이들을 공부시키거나 잘 기르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한인기독학원에 보내면 길찬록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다. 한편, 길찬록은 1928년 5월에 종이쪽에 “長女 順愛, 次子 恩主, 三女 順福, 四子 善主” 라고 기록하였다 (사진 아래). 순복과 선주 이름 밑에 “男女 改嫁 母家有”라고 즉 천연희가 재혼 후 이 애 둘을 데리고 있다고 밝혔다. 7대 독자 길찬록이 첫 아들 데이비드 은주 이외에 해리에게 선주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자기 아들이기를 원했음을 일러준다. 천연희는 1924년 4월 7일에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의 현순 목사의 주례로 박대성과 결혼하였다. 그리고는 ‘법률사 (변호사) 를 사서’ 해리를 박대성의 아들로 다시 출생신고 하였다. 곧 또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박대성이 화를 내며 낙태하라고 야단을 쳤다. 약을 먹었으나 유산은 되지 않았고, 딸 애들라인(Adeline) 이 태어났다. 이때부터 박대성이는 길찬록의 딸 매리와 애들라인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다행이도 길찬록의 첫 딸 순애와 아들 데이비드는 한인기독학원에 다니면서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박대성이가 매리와 애들라인 앞에서 해리에게만 먹을 것을 주는 것을 본 옆집 아주머니가 야단을 칠 정도로 못된 성격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리를 많이 때리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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