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고국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선생의 대한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어 그의 대한 일생을 소개코자 한다. 안창호 하면 독립 운동가며 사상가이자 웅변가요 교육자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는 1878년 11월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서 가난한 집안에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출생 했다.
12살 때 부친을 여의고 9살부터 서당을 다녔고, 18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 왔지만 돈도 다 써버리고 갈 곳을 찾지 못하던 차에 미국 선교사를 만나 선교사가 운영하는 구세 학당에 들어가 먹고 자며 세례까지 받고 기독 교인이 되어 과학, 수학, 역사, 지리 등 새 학문을 배워 눈을 크게 뜰 수 있었다.
1897년 구세 학당을 졸업하고 같은 해 서재필(1864-1951)이 이끄는 독립협회에 가입, 이승만(1875-1965), 이상재(1850-1927) 등과 만민공동회의를 개최, 청년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 명연설을 하였다. 그 후 1898년 귀향해서 한국 최초의 남녀 공학인 점진 학교를 세워 황무지 개척 사업을 했다.
1902년 2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를 하면서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 향상 계몽을 위해 공립신문도 발간, 교포들이 안창호를 민족 지도자로 따랐다. 1906년 다시 귀국하여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발행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했다.
또한 대구 평양서관,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 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세워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하는 중 1911년 일본이 105인 사건을 그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 국민 총회를 조직하여 총회장이 되었고, 1913년에 그 곳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홍사단이란? 무실의 정신으로 진실 하도록 힘쓰자, 역행의 정신으로 실천 하기에 힘쓰자, 충의의 정신으로 충성과 신의를 지키자, 용감한 정신으로 씩씩하게 살자. 이것이 안창호가 외친 흥사단의 4대 정신이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장관, 노동장관, 국무총리 서리 등을 역임, 1928년 한국 독립당을 창당, 이듬 해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 6개월을 감옥에서 고생,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병 보석으로 병원에 입원 중 간경화증으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안창호 전집’이 있고, 그의 애국 애족 사상을 필라에서도 뜻있는 분들이 흥사단 지부를 조직해서 매년 행사를 갖고 있는 것을 치하하고 싶고, 범동포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면 싶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 되었다.
안창호 선생이 외친 연설 중에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맙시다.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간직 합시다. 너도 나도 남녀 모두 민족끼리 사랑 합시다, 서로서로 사랑하여 웃는 세상을 만듭시다. 동포끼리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맙시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어차피 왔다 가는 짧은 인생 여정에 우리 모두 사랑 합시다. 밝은 미소로 인사 합시다. 성경도 고전 13:13, 사랑이 제일 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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