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가 창간된 1969년 남가주의 한인사회는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규모였다. 올림픽 거리에 마켓과 음식점이 생기면서 구심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 그러나 현재는 남가주에만 거의 100만을 헤아리는 한인들이 LA뿐 아니라 주변 위성도시에서도 막강한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본보 창간 즈음에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했던 강태화씨와 최근 LA로 이민한 윤종웅씨 가정을 통해 한인 커뮤니티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해본다.
딸은 외국에 나가 있고 아들도 독립된 성인이 된 후 전 가족이 함께 할 시간은 많지 않다. 모처럼 아들 준(오른쪽 뒤)이 부모와 할머니와 함께 했다.
70년 미국온 강태화씨
젊음 하나 밑천으로 ‘아메리칸 드림’ 일궈
한인 커뮤니티 성장 곁에서 지켜본 산증인
이민이 쉽지 않았던 70년대 이전에 도미해서 현재의 미주 한인 커뮤니티 형성의 기틀이 됐던 이민자 부류에는 강태화씨(60·바이오-사이언스 연구소 대표) 가정이 전형적 케이스로 포함되어 있다.
70년에 유학생으로 미국 땅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목표했던 박사학위도 받았으며 아내(강영애·58)와 1남1녀(아들 강준·29, 아들 강수지·28)의 일가도 이뤘다. 다행히 전공을 살린 연방 FDA 등록 연구소로 외길을 팔 수 있었고 87년에는 노모(송갑순·82)도 모셔와 치노힐스에 직접 지은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그는 36년째 접어드는 이민생활을 한마디로 “I’m O.K.”라고 표현했다. 특별히 성공이랄 것도 없지만 황무지에서 젊은 혈기 하나로 헤쳐온 궤적에 어느 정도 만족한다는 뜻이겠다.
제주도의 한 어촌에서 자랐지만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행을 꿈꿨다. 입버릇처럼 “엄마, 나 미국 보내줘야 해”라고 졸라댔고 그는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그 꿈을 이뤘다.”평범한 삶이지만 어린 시절 꿈 꿔왔던 삶의 모습이 아마도 이 정도였나 봅니다”라고 웃지만 그 웃음에는 부모님은 일본에, 자신은 조부모와 제주도에서 살던 이산가족이 미국에서 오히려 ‘한 지붕 3대 가정’을 이룬데 대한 뿌듯함이 묻어나고 있다.
미국 삶의 첫 기착지였던 시카고를 거쳐 76년에 LA에 입성, 지금껏 다시 어디론가 달아날(?) 생각 없이 살면서 그는 당시 막 태동기를 지났던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과 발전을 보고 겪고 참여했다.
여러 군데 정착의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는 미국이지만 한국과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LA를 선택했다고 한다. 올림픽 거리에나 가야 한인들이 좀 보였을 때였지만 벌써 한국어 신문이 발간되어 본국과 이민사회를 연결해 주고 있었다. 한국어 간판 몇 개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는데 한인 커뮤니티는 80년대 들어 무섭게 성장, 지금은 그가 사는 치노힐스뿐 아니라 LA를 중심으로 한두 시간 운전거리의 모든 지역에 한인거리나 타운을 형성시킨 것이 꿈만 같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으로나 쓰였던 슈라인 오디토리엄을 한인들의 문화행사장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미국의 자존심쯤으로 여겨지는 할리웃 보울까지 전세 내어 대대적 한인축제를 벌이게 될 것까지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저도 일찍 온 편이지만 더 일찍 왔던 이민자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있죠. LA가 원래 사막이었으니 사막에 현재 같은 꽃을 피운 씨앗을 뿌려준 셈이니까요. 여러 시행착오나 특히 LA폭동 같은 무서운 일도 겪었지만 여러 면으로 잘 살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은 정말 자랑스럽지요”
그들 부부도 역시 자녀 교육을 최우선으로 꼽았었다. 1남1녀에게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나 음악도 거의 전공수준까지 병행시켜 ‘건전하고 무난한 성인’으로 키운 것이 큰 보람이다. 또 아직까지도 ‘한라산과도 안 바꿀 우리 아들’ 자랑이 늘어지는 노모와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흐뭇함 중 하나. 이민생활의 버팀목의 하나가 됐던 산에 대한 사랑이 누구 못지 않게 커진 것도 자랑이다. 그는 오랫동안 LA 동부의 토요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산행가이드 등도 집필중이다.
당연히 그는 한국인들의 미국행에 대찬성이다. 특히 기득권층보다는 학연, 지연 등 바탕이 없는 사람들은 비행기 값을 꿔서라도 나와 새 삶을 개척할 곳은 아직도 ‘미국뿐’이라고 힘줘 강조한다.
한인타운 한복판에 자리잡는 바람에 “가족끼리의 동네산책이 쉽지는 않지만 편리한 점이 훨씬 많고 희망이 있어서 좋다”는 윤종웅씨 가족.
작년 이민 온 윤종웅씨
커진 한인 사회 파워덕 순조롭게 정착
피땀 흘린 초기 이민자들께 깊은 감사
한인타운 한복판 아파트에 자리잡고 사는 윤종웅(31·버뱅크 테니스센터 코치)씨와 부인 윤상숙(27)씨는 딸 하진(1년 6개월)양을 품에 안고 꼭 1년 전에 LA에 도착했다.
윤씨의 경우 고등학교 때부터 테니스 선수로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 해외체류 경험은 많았지만 이들 가족은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더 많다’는 믿음 하나로 미국, 그것도 LA를 새 삶터로 선택했다.
1년이 지난 현재 윤씨가 비교적 안정된 직업을 가졌다는 것 말고는 이들 가족의 겉모습은 거의 같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 자세는 크게 달라졌고 무엇보다 ‘희망이 보인다’는 확신에 차 있다. 하와이에서의 유학생활을 거쳐 한국과 미국 중 양자택일을 앞뒀을 때 LA를 선택한 결정에 후회가 없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 출신의 윤씨는 도착 다음날부터 라켓을 들고 땡볕 속에서 여러 코트를 누볐고 벌써 LA나 버뱅크 인근의 한인 청소년들뿐 아니라 미국인 제자들도 꽤 많아졌다.
건강에 관심이 높아지고 따라서 테니스에 대한 열기도 뜨거워지기 때문에 테니스 아카데미 구상 꿈도 충분히 실현될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기고 있다.
아직은 아기 양육과 남편 내조에만 전념하는 상숙씨도 딸이 학교에 가게 될 몇년 후엔 평소의 관심분야인 패션을 다시 공부한다는 기대가 크다. 자신의 전공인 컴퓨터와 패션을 접목할 수 있는 가능성을 LA에서 지낸 짧은 기간에 보고 있다는 것.
이들은 또 딸에게 공부와 테니스를 모두 잘하게 시킬 수 있을 듯한 교육환경에도 대만족이다. 한국에서는 운동선수가 학업을 열심히 하기가 극히 힘들지만 이 곳 학교는 무리 없이 두 분야를 다 열심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짧은 이민 역사에 비해 엄청난 규모로 형성된 LA 한인 커뮤니티와 나날이 더 확대되는 한인파워 덕분에 늦깎이 이민 가정들이 큰 충격 없이 뿌리내릴 수 있는 것에 이민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한인들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인줄 상상도 못했죠. 음식이나 각종 뉴스나 정보 얻기, 또 문화생활에 대한 불편도 전혀 없고… 미국 속에 작은 한국이 여기 있는 거예요. 20년을 살아도 영어 못하는 사람들 투성이라더니 이런 대단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죠. 이렇게까지 되기까지 초창기 이민자들의 피땀이 얼마나 뿌려졌겠어요. 늦게 왔지만 우리도 열심히 살아서 한국인이나 코리안 아메리칸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보다 늦게 오는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와 바람직한 역사를 남겨 줘야죠.”
이민과 LA 한인타운 정착에 거의 100%의 만족감을 표시하던 윤씨도 그러나 한인타운의 범죄율이 높다는 데는 불안해한다.
한국처럼 아이를 데리고 밤낮으로 길을 걸을 수 없는 것과 대중교통수단의 부족, 또 타운 내에 공원이나 놀이터 등이 부족하다는 것을 불편사항으로 꼽았다.
한국에서 최근 일고 있는 이민열기에 대해 윤씨는 “가능하면 이민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도피성이나 무작정 이민이 아니고 사전 정보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글 이정인·사진 신효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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