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필 한의원 “한의사는 천직… 보람찬 31년”
이준필 옹(왼쪽)이 아들 종진씨가 한약 짓는 것을 지도하고 있다.
48세에 태평양을 건넜던 중년의 신사는 이젠 여든 고개를 살짝 넘었다. 그러나 그는 ‘남산 위 소나무’처럼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뀌는 동안 웨스턴과 7가를 꿋꿋이 지켜왔다.
1974년부터 ‘이준필 한의원’을 운영해온 이준필(81)옹. ‘30년 넘게 한 곳에 머무르면서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힘들 게 뭐 있어. 한의사가 천직인데. 기분 좋게 생각하고 살면 다 괜찮아”라고 답하는 이옹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이옹은 72년 침의 대가를 소개해달라는 국무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 정부의 추천을 받아 미국에 건너왔다. 연방 정원의 지원 아래 이옹은 ‘웨스트 코스트 메디컬 그룹’의 백인 의사들에게 한국 침술을 가르쳤다.
집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이옹이 웨스턴에 나온 건 74년. 당시에는 한인타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웨스턴에는 옷 장사를 하는 백인이 주류였다. 한인 수도 5,000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옹은 그때가 한의사로 더 보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때는 한인들이 자본이 없어 대개 노동을 많이 했고 몸을 많이 다쳤다. 그러나 몸이 아파도 미국 병원을 찾을 엄두는 내지 못했고 의지하는 건 침뿐이었다. 한의사가 딱 세 명이라 하루에 30∼50명씩 환자가 몰려들었지만 힘든지 모르고 일했다.”
이옹은 나이 때문에 이젠 침을 잡지는 못한다. 진료 시간도 오후 2시까지로 줄였다. 하루 10명 정도만 진맥을 하고 침은 아들인 종진(녹십자병원장)씨에게 맡긴다. 건강만 허락하면 85세까지 환자를 맞을 생각이다.
“부지런히 더 일해서 한인도 미국인 못지 않게 잘 살게 됐으면 좋겠어. 그게 마지막 바램이지.”
<김호성 기자>
서독안경 한인들의 눈 밝힌 안경업계 맏형
35년간 가업으로 안경원을 운영하고 있는 ‘서독안경’의 김승태(왼쪽),
응수 부자.
‘서독안경’의 김승태(75)회장과 응수(50)사장 부자는 35년간 수많은 한인들의 ‘눈’이 돼왔다.
부자는 아버지가 41세, 아들이 16세였던 1971년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처음 안경원을 오픈했다. 그후 부자는 1979년 미국으로 왔고 1981년 올림픽가에 서독안경의 간판을 올렸다.
LA의 첫 둥지는 올림픽과 아드모어에 위치한 ‘올림픽샤핑센터’였다. 건물을 건축해 입주한 뒤 1993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해 올림픽과 하버드에 ‘한국플라자’를 다시 건축, 이전했다. 1999년 이 빌딩을 매각했지만 한국플라자가 여전히 서독안경 건물로 불리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재정적으로 부족할 것 없는 이들은 왜 30년 이상 가업으로 안경원을 운영하고 있을까. 김 사장은 “앞이 잘 보이지 않던 분들이 선명한 세상을 보게 됐을 때 느끼는 보람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든다”면서 안경원 운영의 보람과 의미를 되새겼다.
부자는 25년간 올림픽가에서 한인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지켜봤다. ‘서독안경’에서 일을 배워 독립한 직원들이 개업한 안경원도 4∼5개나 된다.
서독안경은 앞으로도 가업으로 이어진다. 김 사장의 둘째 아들 버나드(22)씨가 대학에서 비즈니스 전공을 마치면 서독안경에 합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더 좋은 기술로 시력이 약한 분들에게 편안한 안경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김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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